십자가와 부활의 표징
요나 3,1-10; 루카 11,29-32 / 2022.3.9.;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와 남방 여왕의 표징을 빗대어 당신이 보여주실 표징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요나의 표징이란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더러 회개하지 않으면 니네베가 40일 안에 망한다고 경고하자 니네베 임금이 단식을 선포하며 회개한 일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기원전 765년과 759년에 대기근이 일어나는 바람에 정복전쟁에서 끌려온 포로들이 두 번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763년에는 대낮에 어두워지는 개기일식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요나의 표징은 자연과 사회에서 일어난 현상을 겪으면서 하느님께서 더 큰 재앙을 일으키실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 권력자들에 의해서 일어난 회개를 뜻합니다.
그런가 하면 남방 여왕의 표징이란 이스라엘 남방 스바에서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자 찾아왔던 옛 일을 말합니다. 이때 여왕은 금과 향료 등 사치스런 선물로 사례했고, 솔로몬은 이 선물들로 호사를 누리면서 여왕이 함께 가져온 신상들까지 궁정 안에 모셔놓았습니다(느헤 13,26). 이것이 신호탄이 되어 솔로몬은 외국에서 데려온수많은 왕비들과 후궁들이 섬기던 우상들까지도 모조리 신당을 지어주기 시작하면서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던 지혜는 사라지고 하느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1열왕 11,1-13). 그러므로 남방 여왕의 표징은 하느님의 지혜를 청하느라 땅 끝에서부터 찾아오는 수고를 하고, 값비싼 선물까지 주었지만 우상숭배의 빌미까지도 제공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헛수고를 한 일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군중을 향하여 ‘악한 세대’라고 단죄하신 까닭은 그토록 회개하기를 가르침으로 촉구하시고 기적으로 또 재촉하셨는데도 그들이 회개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난 지 한 세대만에 로마군의 침공을 두 차례 받아 성전과 도성이 완전히 파괴되고 무려 2천 년 동안 전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회개하기를 미루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 말씀의 표현으로, “남방 여왕이 이스라엘 백성 중 그 당시 세대와 지난 2천 년 간의 모든 세대들이 함께 되살아나서 단죄할 사람들”은 바로 우리 세대요 그 중에서도 우리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나보다 더 크고 솔로몬보다 더 큰 이로 당신 자신을 소개하셨는데, 그 표징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겨레를 보우하시고 이끄시는 역사의 표징은 여러 차례 일어났었습니다. 그래서 고려시대 불교로도 조선시대 유교로도 없앨 수 없었던 하느님 신앙이 수천 년 동안 겨레의 심성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샤마니즘 혹은 무교라고 부르는 이 하느님 신앙의 영향력은 주술과 역술에 의존하는 무속인이나 역술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어 온 민간의 심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단지 그들은 올바른 하느님의 신앙의 방식을 아직도 만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표징, 즉 십자가와 부활의 표징이 필요한 자리가 있습니다. 하느님이라는 같은 이름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내용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실상 하느님께서 우리 겨레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신 일은 2백여 년 전에 기묘한 섭리로 천주교 신앙을 깨우치게 하심으로써 일어났습니다. 조정과 유림 등 권력자들은 백 년 간이나 박해를 가하고서 이를 어쩌지 못했습니다. 이 박해로 짊어져야 했던 겨레의 십자가는 그 후에도 반세기에 걸친 일제의 종살이, 겨레가 갈라지는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 가난과 독재, 친일적폐세력의 국정농단 등으로 이어졌지만, 끝내 선한 영향력을 잃지 않고 위기 속에서 더욱 단결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히려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고, 전방위적으로 한류가 그 선한 영향력을 온 세계에 미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더 남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겨레 안에서 이 선한 영향력으로 일하고 계심을 알아차리는 민간의 회개가 일어나야 하고, 이를 위해 먼저 믿은 이들이 분명한 하느님의 빛과 매력을 보여주려는 교회의 회개가 또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번영하는 단체가 되려고 하지 말고 사회의 번영의 그늘에 뒤처진 이웃들을 보살펴주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러자면, 성전을 신축하거나 본당을 신설하는 데 큰 돈을 쓰기보다 소외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하고, 교회의 인력과 조직도 재조정하여 우리 교회 자신을 위한 관리 부문보다 복음적인 실천을 위한 부문에 더 투입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을 위한 십자가의 길이고, 예수님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미 천주교의 일원이 아니더라도 겨레의 공동선에 관심을 갖고 투신하는 이들을 격려하며 그들이 받고 있는 선한 영향력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함께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민족 사회의 공동선이 증진되고 사회악이 제거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 머지않아 겨레 안에서 부활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니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복음 환호송. 요엘 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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