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예배와 올바른 제사
신명 26,16-19; 마태 5,43-48 / 2022.3.12.;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미사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 하느님, 저희가 마음으로 회개하고, 언제나 필요한 그 한 가지만을 찾으며 사랑을 실천하여,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본기도).
구약 시대에는 모세가 정해준 율법이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규정하였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신명 26,16)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섬기는 길이었고, 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돌보아주시겠다던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의 관계를 율법을 넘어 사랑으로 규정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함은 물론 원수도 사랑해야 하고 심지어 그 원수가 박해를 하면 기도를 해 줄 수도 있어야 한다고까지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도 이 말씀을 어려워하고, 믿으려던 이들도 이 말씀을 핑계 삼아 믿기를 망설이곤 합니다.
그런데 어제의 복음에서 들으신 바를 상기해 보자면, 사랑이 율법을 넘어서는 진리일 수 있는 이유는 보편적이라는 데 있고, 또한 사랑이 생각이나 말로만 그쳐서는 안 되며 실천되어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과 최소한이라는 한도가 정해질 수밖에 없는 윤리입니다. 사랑의 최대한은 상대방이 나에게 해 주기를 원하는 것을 먼저 내가 그에게 해 주는 것이고, 이는 모든 사람을 상대로 해서는 지킬 수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가족이나 지인 또는 사도직에서 주어진 최소 범위의 소수 사람들에게만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필요한 자기 희생 내지 자기 헌신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믿는 이들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부르신 열두 제자들을 상대로 이 최대한의 사랑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당신에게 해 주었으면 하셨던 바를 예수님께서는 스승으로서 먼저 하셨습니다. 믿어 주신 것도 그래서였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쳐주신 것도 그래서였으며, 종처럼 그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도 그래서였고, 잘못을 저지른 제자를 용서하신 것도 역시 그래서였습니다. 유다가 스승을 배신할 마음을 먹은 낌새를 눈치채시고도 먼저 내치지 않고 끝까지 기다려주신 일이 그렇고, 수제자로서 스승을 부인한 베드로에게는 나무라지 않고 찾아가셔서 끝내 신앙의 고백을 받아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열두 명의 범위 안에서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적인 인연을 맺으신 범위가 그렇다는 것이지, 우리들 각자에게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 어머니께 대해서는 아들로서 할 수 있는 효도를 다 하셨습니다. 어려서는 순종하셨고, 장성해서는 당신 어머니가 가르치고 전해준 신앙에 따라서 복음선포를 하셨으며, 당신이 먼저 세상을 떠나시게 되자 가장 사랑하셨던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당신이 하셨듯이 어머니를 모셔달라고 요한에게 유언을 남기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가족에게 대해서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상대로 해서는 최소한의 사랑을 지켜야 합니다. 즉, 누구든지 나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일, 즉 무시한다거나 차별한다거나 폭력을 저지르거나 속인다거나 하는 일들은 우리도 누구에게든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의이고, 규범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열두 제자 이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두가이들에게 성전정화 사건으로 일깨움을 주셨지만 모욕하지는 않으셨고, 바리사이들과 일일이 맞서셨지만 앙갚음을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렇듯 우리에게 주어진 인연 안에서 최대한의 사랑으로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참된 예배요 올바른 제사입니다. 이제 우리는 구약 시대의 하느님 백성과 달리 신약 시대를 살고 있는 하느님 백성입니다. 그러니 그 기준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실천적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이 십자가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이 십자가야말로 세상의 어둠을 비출 수 있는 진리의 빛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진리를 세상은 알지 못하기에 욕심과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갈등과 스트레스가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부딪치는 거의 대부분의 갈등과 스트레스는 자기 욕심과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이어서, 이를 조금만 줄여도 대부분의 갈등이 해소되고 스트레스가 확 줄어듭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이 세상살이를 지옥이 아니라 천국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 천상의 지혜이기도 합니다. 이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유혹을 누구나, 또 수시로 받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유혹을 뿌리치고 당신처럼 사랑할 수 있도록 말씀과 성찬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미사를 마치면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주님, 천상 양식을 받은 저희를 끝까지 돌보아 주시고, 천상 지혜를 받은 저희를 구원의 샘으로 이끌어 주소서”(영성체 후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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