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사순 제1주일]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수성구 2022. 3. 6. 05:57

[사순 제1주일]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신명 26,4-10; 로마 10,8-13; 루카 4,1-13

2022.3.6.; 사순 제1주일; 이기우 신부

 

1. 오늘은 사순시기의 첫 주일입니다. 우리는 연중시기를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보도를 들으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내려오시며 하늘에서 그분의 신성을 알려주는 메시지가 들려왔음을 알았습니다. 이때 내려오신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공생활을 앞두고 광야에서 하느님께 홀로 기도하시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도 알아야 하겠거니와 그분의 기운을 받아야 하겠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정신을 더욱 명료하고 날카롭게 하시고자 단식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다 보니 사십 주야에 걸쳐, 그야말로 목숨을 건 처절한 고행이 되었습니다. 

 

2. 그런데 광야에서 단식하며 기도하시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정신은 명료해지며 날카로워지셨지만, 육신은 극심한 허기로 시달리셨습니다. 이를 틈타서 악마가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음식과, 허기에 따라 피폐해진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영광과, 영광에 따라 뒤따라올 수 있는 교만을 부추겼습니다. 

 

3.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에 일어난 이 두 사건, 즉 세례와 유혹이 사실은 공생활 내내 일어난 현상이고, 이 사건과 현상의 본질을 모두 파악해야 그분의 참 모습과 역할을 깨달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기사와 유혹 기사가 다 일생의 줄거리를 전해주는 이야기를 짐작하게 해 주는 복선인 것입니다. 

 

4. 예수님의 공생활은 3년 내내 하늘이 열리는 과정이었고, 그분의 부활과 승천은 그분에게 열린 하늘이 믿는 이들 모두에게도 열리는 계기였습니다. 제자가 되려는 나타나엘에게 예수님께서 장담하신 바가 이것이었습니다: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0-51). 열려진 하늘에서 내려오신 성령은 줄곧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끄심의 핵심은 그분이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아들이시고, 그분을 가장 닮은 아들이시니 믿는 이들이라면 모두 그분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이렇게 세례 기사의 메시지는 공생활 내내 적용되었습니다. 

 

5. 세례만이 아니라 유혹도 공생활 내내 예수님을 뒤따라 다녔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존중해 줄 것과 성전에서 번제를 드리는 구약의 제사 형식에 따라야 한다고 요구했는데,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사건으로 이 요구를 행동으로 거절하시자 탄압이 시작되었고 끝내 그들은 그분을 죽임으로 몰았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해석해 놓은 율법의 권위를 존중해 줄 것과 자신들과 같은 노선을 걸을 것을 요구했는데, 사사건건 예수님께서 비판하시자 그들은 그분의 기적에서 나타나는 권능도 마귀에게서 빌려온 것이라고 험담하거나 그분이 말씀으로 밝히시는 신성도 부인하고자 애쓰다가 끝내 사두가이들과 야합하여 그분을 죽임으로 몰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분이 보이시는 기적의 능력에만 열광하여 억지로라도 왕이 되어 달라고 졸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끈질긴 요구를 피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시자, 끝내 그들은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음모가 사악한 요구임을 알면서도 침묵하거나 방관했고, 일부는 혁명당원들의 선동에 못이기는 척 따라갔습니다. 악마의 유혹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혁명당원들과 내통하고 있었던 이스카리옷 유다는 공생활 내내 예수님 곁에서 로마와의 대결을 내심 기다리다가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시던 그분이 자신이 기대한 대로 움직이지 않으실 것이 분명해지자 끝내 사두가이와 결탁하여 스승을 배신했습니다. 당대 유다인들의 우상숭배적 처신에 숨겨진 악마의 유혹이 실제적인 죽임의 공포로 나타날 즈음에 예수님께서 고뇌하신 바가 겟세마니 동산 기사에 나타나 있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루카 22,42).

 

6. 세례와 유혹을 전하는 기사의 복선적 성격은 복음서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들로 인해 이루어진 교회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신앙인의 일생에서도 또 교회의 역사에서도 세례와 유혹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신 성령의 이끄심과 악마의 유혹은 어김없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비단 나타날 뿐만 아니라 확대되기도 하고 반복되기도 합니다. 개별 신앙인들의 신앙 역사에 대해서는 각자가 식별할 일이거니와,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만 극히 간단하게 간추려 보면 이러합니다. 

 

7. 20세기 중반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러한 역사의 교훈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공의회에 모인 교부들은 그리스도 신앙이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기 전까지 박해로 순수했던 교회가 공인 이후에 로마 제국의 제도와 권력을 본받으면서 또 다른 제국이 되어 180도로 달라진 역사의 현실을 뼈아프게 반성했고, 역사가들은 이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조롱하였습니다. 천동설을 믿던 교회가 지동설이 과학적 진리로 드러난 후에도 자기중심의 세계관을 고집하고, 구원의 길을 독점한 듯이 다른 종교와 문화를 무시하는 행태를 비판한 것입니다. 심지어 유럽의 백인들은 예수님도 백인으로 묘사했으며 그리스도교는 유럽을 위한 종교라는 전제 하에서 신학을 전개해 왔습니다. 로마 제국의 공인 이전과 이후가 마치 세례와 유혹처럼 다가와서, 공인 이전에는 박해 속에서도 성령의 이끄심을 받았지만 공인 이후에는 권력과 재물과 영예의 유혹을 악마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럽 여러 나라의 왕정 위에 군림하는 황제가 되었고, 그 권세로 십자군 전쟁도 일으켰으며, 그 권세가 흔들리려 하자 베드로 대성전을 크고 화려하게 짓기도 했고, 이에 반발한 그리스도인들이 떨어져나가자 내부 단속을 위해 더욱 엄격하고 차별적인 교회 내부 질서를 다잡는 바람에 마녀사냥도 일어났고 종교재판도 인권을 해칠 정도로 다반사로 일어났었다는 것입니다. 

 

8.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이런 통렬한 자각에 힘입어 지난 대희년에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러한 가톨릭 교회의 잘못들을 인류 앞에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참회하였습니다. 그리고 다 함께 새롭게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자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한국 천주교 주교단에서도 신앙이 전래된 이후 민족에게 끼친 누와 잘못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참회하는 예를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4년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에 더하여 쐐기를 박듯이 한국 천주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주교단 앞에서 천명하였습니다. 악마의 유혹을 받고 있는 현상을 냉정하게 경고하면서 그 대신에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는 교회가 되라고 간절하게 권고한 것입니다. 다음은 한국 천주교회가 받고 있는 유혹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경고한 메시지를 일부 발췌한 내용입니다.

 

9. “번영의 시대에 떠오르는 한 가지 위험,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저 또 다른 ‘사회의 일부’가 되어 버리는 위험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신비적 차원을 잃고, 성체성사를 기념하는 능력을 잃으며, 그 대신에 하나의 영적 단체가 되는 위험입니다. 이 단체는 그리스도교 단체이며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을 가진 단체이지만 예언의 누룩이 빠진 단체입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가난한 이들은 더 이상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적절한 역할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이 유혹에 특정 교회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과거 오랜 세월 동안 크게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어떤 사례들에서 이런 교회와 공동체들은 그 자체가 중산층이 되어서 그런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가난한 이들이 심지어 수치감을 느낄 정도가 됩니다. 이것은 영적 ‘번영’, 사목적 번영의 유혹입니다. 그런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부유한 이들을 위한 교회, 또는 돈 많고 잘나가는 이들을 위한 중산층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는 낯선 일도 아닙니다. 이 유혹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코린토 신자들을 질책해야만 했습니다(1코린 11,17). 그리고 야고보 사도는 이 문제를 더욱 강하고 명확하게 제기했습니다(야고 2,1-7). 그는 이들 부요한 공동체들, 부요한 사람들을 위한 부요한 교회들을 질책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배제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들이 누리는 생활양식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그들 공동체에 들어가기를 꺼리게끔 하였고 가난한 이들은 그런 공동체에서 편안하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번영의 유혹입니다.“ 

 

10. ”저는 여러분 주교들께서 좋은 일들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는 지금 여러분을 훈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 자신의 형제를 확인해야 할 의무를 지닌 한 형제로서,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의 교회는 번영하는 교회이고 매우 선교적인 교회이며 위대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악마가 교회의 예언자적 구조 자체로부터 가난한 이들을 제거하려는 이런 유혹의 씨앗들을 뿌리도록 허용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악마로 하여금 여러분이 부요한 이들을 위한 부요한 교회, 잘 나가는 이들의 교회가 되게 만들도록 허용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그렇게 된다면) 그 교회는 아마도 “번영의 신학”을 펼치는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제대로 되지 못하는) 그저 그런 별 쓸모없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아직 현재 진행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