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수성구 2022. 2. 28. 06:12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1베드 1,3-9; 마르 10,17-27 / 2022.2.28.;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달려온 그는 무릎을 꿇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병을 고치거나 배불리 먹는 일 따위에만 관심을 보이던 여느 중생과는 사뭇 다른 구도적인 태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선 십계명을 지키라고 권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그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다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유복한 바리사이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은 젊은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대견스럽게 여기시면서도 한 마디를 덧붙이였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킬 정도의 도덕성을 자부했던 그가 재물에 대한 집착도 심해 보여서인지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보셨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이었습니다. 이는 그 당시 돈을 좋아했던 유다교의 엘리트 계층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루카 16,14). 평소에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고 선포하시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빼먹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려는 것과도 같은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도 스승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회개한다는 것이 삶의 태도에서 과연 어떠한 것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던 것 같고, 재물이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던 바리사이들의 신앙관에 물들어 있었던 듯합니다. 

 

  여기서 복음서에서 나오는 예외적인 인물이 있으니,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처럼이나 힘들고 중요한 일을 해 낸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입니다(루카 19,1-10). 그는 자신의 집을 찾아주신 예수님 앞에서 거의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을 했습니다.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공적 기피인물로 따돌림 받던 그를 예수님께서 받아주시자 벌어진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 진정으로 귀의한 사람에게는 가능하다는 예수님 말씀이 입증된 셈입니다. 

 

  예수님부터 재물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우셨거니와(마태 8,20), 제자들에게도 집과 직업과 가족까지도 모두 버리고 따르기를 요청하셨습니다(마태 4,20.22). 그들을 전국으로 파견하실 때에도 마찬가지로 철저한 청빈의 태도를 요청하셨던 이유는(마태 10,9-10), 그렇게 하더라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토박이 지지자들이 그들을 환대해 줄 것기 때문이었습니다(마태 10,11). 

 

  이렇듯 재물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예수님의 태도와 가르침은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을 낳았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고”(사도 2,44),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습니다(사도 2,45). 그래서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사도 4,34). 

 

  이것이 예수님과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교회가 걸었던 정통 노선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그 부자 청년이 처음에 그분을 부른 호칭은 “선하신 스승님!”(마르 10,17)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18)고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그 당시 유다교에서 최상급에 속하는 인물이 행해 온 선행의 허접한 수준에 대한 판단이 들어 있습니다. 유복하게 살면서도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은 외면하던 그 사람, 그래도 자신들은 의롭고 선하다고 자처하면서 영원한 생명까지 얻어 누리려던 이 부자 청년의 처지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문명을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하느님의 선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삶을 영위하고 있는 많은 현대인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양심에 입각한 도덕성만으로 재물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마귀가 소유욕을 미끼로 해서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도 이러한 어중띠기 인생들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재물의 결핍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려면 소유욕을 미끼로 유혹하는 마귀와의 고리를 끊어내고,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1베드 1,3-4). 그러니까 가진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행위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부활 신앙이고 그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리라는 확신이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이 입증해 보였듯이, 하느님을 믿는 이들끼리 부활 신앙으로 서로 나누는 삶이 그 해답입니다. 교우 여러분! 재물에 대한 집착은 우상 숭배에로 우리 마음을 기울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부족한 한 가지는 나눔 이전에 우리를 하느님께로 불들어 매어 줄 부활에 대한 확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