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부자들이여!"
야고 5,1-6; 마르 9,41-50 / 2022.2.24.; 연중 제7주간 목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그 동안 삼 년 가까이 갈릴래아 지방에서 전국에서 모여든 군중을 상대로 가르치셨던 바를 당신 제자들에게 종합하여 요점 정리를 해 주셨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가서는 적대자들이 마련해 놓은 죽음의 올가미가 기다리고 있음을 예상하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으로서는 작정을 하고 꺼내 놓으신 말씀 보따리였습니다.
“너희가 내 백성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면 상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반대로 내 백성 중 보잘것없어 보인다고 해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면 구원받을 대책이 없다. 그러니 네 손이나 발이 죄를 짓게 하면 그 손과 발을 잘라 버려라”(마르 9,43.45.47).
야고보 사도는 열두 제자 출신으로서 예수님과는 친척 형제지간입니다. 열두 제자 중에 또 다른 야고보와 구분하여 작은 야고보라고 부릅니다. 작은 야고보는 예수님께 대해 냉랭하고 도무지 믿지 않았던 나머지 친척 형제들과도 판이하게 달라서, 정의감과 의협심을 타고 난 듯합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인 야고보서 5장에서 부자들과 그들의 재물에 대해서 신랄한 심판의 언어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은 예수님의 백성 가운데 가난하다고 해서 무시하고 착취한 벌을 받을 각오를 하십시오. 그대들이 지옥으로 만들어 놓은 현세에서 손과 발과 눈으로 지은 죄의 무게를 그리고 죽기 전에 다가올 지옥의 벌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들을 착취하여 벌어 놓은 그대들의 재물은 썩을 것이고 그 돈으로 장만한 그대들의 명품 브랜드 옷들은 좀먹을 것입니다. 금고 속에 쟁여 놓은 금과 은, 그리고 환금성 보석들은 녹슬 것이며 그대들이 가로챈 노동자들의 품삯이 소리를 질러 하느님의 천사들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대들이 단죄하고 죽인 의인들이 하느님 앞에서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당신 가르침의 종합이듯이, 사도 야고보의 권고 역시 그렇습니다. 복음화의 종합판은 윤리에서 판가름나고 이는 최고선의 가치 중 평등과 정의의 문제에서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부유국과 빈곤국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는 가운데, 부유한 나라 안에서도 빈부격차는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 부유한 선진국들은 거의 그리스도교 문화권에 속한 미국과 유럽의 백인 국가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중심으로 한 복음화의 성적표가 국가간 그리고 국내의 양극화 현상인 것입니다. 적어도 이들 부유한 나라들의 교회는 자기네 정부의 정책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복음화의 성적표입니다.
그런데 지난 해 국제연합 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는 설립 이래 사상 처음으로 예외적인 조치를 만장일치로 단행하였습니다.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한 것입니다. 이는 반세기 전만 해도 후진국이었던 우리나라가 바야흐로 그동안 국가 성장의 모델로 삼아 왔던 유럽 선진국과 같은 대열에 합류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유일한 예외로서,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10위에 오르고, 수출액 규모로는 세계 7위에 오른 결과를 반영한 것입니다.
이는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만한 대단한 국가적 경사입니다.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들은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경영으로 가난한 나라들을 수탈하고 착취한 죄의 대가로 벌어들인 부와, 이 부를 기반으로 자본과 기술의 우위를 선점한 효과 덕분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국은 식민지를 경영하지 않고 자력으로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선진화의 순도에 있어서 우리나라가 훨씬 도덕적 우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들이 국내에서 보여주는 경제적 불평등 현상까지도 한국은 고스란히 따라하고 있습니다. 불법과 탈법을 마구 저지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번 우리나라 부자들이 선진국 부자들의 악습도 따라하고 있어서, 천민자본주의 구조를 고착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불평등은 세대를 넘어 고착되어 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고, 선진국이 되었다는 이 나라에서 자신들의 삶은 나아지지 못한 데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아시아에서는 괄목할 만한 교세 신장을 이루어 그동안의 모델이었던 유럽 교회를 따라잡는 서구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의식과 행태도 유럽 신자들을 흉내내는 세속화의 추세도 만연되어 버렸습니다. 그나마 한국 사회는 일부 첨단 제조업 분야와 문화적 한류에서는 물론 시민의식 수준에서 선진국 수준을 넘어 그들 나라까지도 이끌어 가는 선도국이 되고 있는 반면에, 한국 교회는 유럽 교회를 선도하자면 한참 멀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가야할 길은 이것입니다. 믿음은 성경과 복음에 따라야 하고, 전례와 성사는 이 믿음에 따라 활성화시켜야 하며, 전례와 성사에 따라 사회적 실천을 하되 구체적으로는 시대의 징표를 읽어서 사도직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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