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수성구 2022. 1. 9. 04:38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사 42,1-7; 사도 10,34-38; 루카 3,15-22

2022.1.9.; 주님 세례 축일; 이기우 신부

 

⒈ 오늘은 성탄 시기를 마감하는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한처음에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시던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하느님 백성이 사는 이스라엘 땅에 유다인으로서 오시어 나자렛 가정에서 자라시다가 서른 살이 되었을 무렵에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사명에 따른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즉, 요르단 강가에서 물로 세례를 베풀던 요한에게로 찾아가서 여느 죄인들처럼 물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세례는 죄를 씻고자 받는 것인데도 죄도 없으신 분이 다른 죄인들처럼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향후에 당신을 믿고 따르게 될 이들이 본받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먼저 세상에 물든 죄를 씻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실천해야 구원될 수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⒉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루카 복음사가는 세 가지로 전해 주었습니다. 먼저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내려오셨으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징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 이후 전개되는 상황의 성격이 창세기가 전해주는 첫 번째 창조를 능가하는 새로운 창조의 상황임을 암시합니다. 창세기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첫 사람을 당신을 닮도록 창조하셨지만,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지었고, 그 죄가 쌓이고 쌓여서 무법천지가 되자 노아의 때에 대홍수로 심판하시고 세상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보시기에 의로웠던 노아의 후손들이 시작한 새 세상 안에서도 또 다시 죄를 저지르는 자들이 늘어나자, 그들 가운데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하느님 백성을 이루도록 해 주셨지만, 그들 역시 우상숭배 풍조에 물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가장 닮은 아드님을 보내시기로 작정하셨고, 드디어 그렇게 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세례로써 새로운 창조하시는 길을 여시는 시작이 오늘 우리 교회가 전례로 선포하는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이를 알려주시는 말씀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나타난 세 가지 징표의 뜻을 밝혀준 계시였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ㄴ).

 

⒊ 그런데 창조는 혼돈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창세기가 전해주는 창조의 상황은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는 진술과 함께,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는 진술이 이어서 나왔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창조의 시작을 알리는 예수 세례 사건의 본질도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내려오시며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존재라는 계시적 선언에서 나타났지만 또한 역사적이고도 사회적인 어둠의 맥락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즉 그분이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시는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적 상황이 얼마나 어두웠는지는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으나 선민의식에 젖어 교만에 빠지고 율법 만능에 젖어 사실상 우상숭배에 빠져서 하느님을 저버린 그들 안에서 죄가 늘어나는 바람에 요한은 “심판의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다”(루카 3,9)고 매섭게 질타하여 심판의 언어를 쏟아냈습니다. 그러니 생활태도를 바꾸어서 하느님 나라에로 회개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⒋ 예수님께서 이러한 심판 설교를 하던 세례자 요한에게로 가서 그로부터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그의 메시지에 동의하셨음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두드러지던 다른 세력들의 노선에는 동의하지 않으셨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 다른 세력들이란 로마와 타협하며 성전의 제사를 독점하던 사두가이파 사제들의 보수세력이 있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희구하지만 율법에 대한 지식으로 백성들 위에 군림하던 바리사이파 평신도 부자들의 진보세력이 있었습니다. 로마로부터 억압당하는 데다가 예루살렘의 부재지주들로부터 수탈을 당하던 갈릴래아 출신들 사이에서는 무력으로라도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하려던 열성당원들의 젤로데파의 혁명세력이 있었고,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사두가이파 사제들의 부패상에 진저리를 치며 갈라져 나와 독립된 수도공동체를 이루던 에세네파 사제들의 급진세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건의 사회적인 뜻은,  이들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이거나 혁명적이거나 급진적인 이상 네 부류의 세력들의 노선에는 동의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파국을 엄중하게 의식하던 세례자 요한의 노선에 동의하셨다는 것입니다. 

 

⒌ 이같이 이스라엘에 임박한 파국적 상황에 대한 시국관을 공유하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처럼 세례 운동을 전개하시기보다는 제자들을 불러 모아 이를 발판으로 새로이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그 운동의 메시지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고 이를 믿어라.”(마르 1,14) 하는 말씀입니다.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루카 4,16-30)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새 창조로서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 복음의 선포 활동은 그분이 양성하신 사도들에 의해 시작된 교회에 의해서 계승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교회에서 받은 세례는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새로운 창조에 동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례 때에 받은 새 이름은 이미 앞서 그 길을 걸어가신 성인의 삶을 본받아 새로 태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때에 우리 삶에 탄생한 영적인 몸은 우리가 신앙의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성장하는 것이고, 이는 부활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육신의 부활 신앙’이 말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지요. 이때의 ‘육신’이 의미하는 바가 ‘영적인 몸’입니다. 우리도 세례 받을 때에 하늘이 열렸으며, 성령께서 내려오셨고, 영적인 몸을 받아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로 태어났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⒍ 이제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낸 교회는 연중 시기로 들어갑니다. 이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처럼 세상에 나아가 복음으로 새 창조를 계승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그 노력에 따라서 영적인 몸이 성장하고 부활 은총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며, 세상은 복음을 듣고 예수의 신성을 알아보며 그분의 복음에서 나오는 선한 가치들로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가치들은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최고선과, 인간의 존엄성과 재화의 보편성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및 연대성과 보조성의 공동선입니다. 이 가치들이 구현될 때 비로소 세상은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두 번째 새로운 창조의 질서가 정연하게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⒎ 지금 말씀드린 최고선과 공동선의 가치들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하느님 나라의 가치들을 현대적으로 표현한 용어인데, 이를 위한 투신과 노력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십자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물의 세례를 받으셨지만, 정작 공생활을 마치실 때에는 당신이 반드시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내리시는 불의 세례요 십자가의 세례였습니다(마르 1,8; 10,38; 루카 12,50).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공동체로 문명을 창조하시는 과업에 있어서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시면서 당신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십자가를 멀리하지 말고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것이 물의 세례에 이은 불의 세례요 성령의 세례이며 십자가의 세례입니다. 성령께서 이를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시키실 것입니다. 두 번째 창조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룩됩니다. 우리도 세례성사를 받을 때에 하느님의 자녀로 선언받았는데, 최고선과 공동선의 가치에 헌신하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