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현 대축일]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이사 60,1-6; 에페 3,2-6; 마태 2,1-12
2022.1.2.; 주님 공현 대축일; 이기우 신부
⒈ 공현은 평화의 빛
새 해 첫 날을 평화의 날로 맞이한 우리는 이어서 둘째 날인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세상에 오신 구세주께서 공적으로 드러남을 기념하는 공현은 다른 무엇보다도 세상에 평화를 드러내는 일이어야 함을 전례가 말해줍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구세주를 믿는 이들, 즉 그리스도인들이 메시아 백성으로서 역사의 주체로 나서서 평화를 적극적으로 실현해야 할 소명을 의미합니다.
⒉ 말씀의 흐름: “일어나 비추어라!”
오늘 첫째 독서는 이사야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동족을 친근하게 ‘예루살렘’으로 부르면서 전한 예언인데, 고향이 폐허더미로 변해 있는 절망적인 여건에서도 장차 오실 메시아를 내다보면서 이런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이사 60,1). 어둠이 땅을 덮은 것으로도 모자라 암흑천지인 예루살렘에서도 주님께서 오시면, 태양이 떠오르듯이 진리의 빛이 나타나서 그 영광이 떠오르리라는 것입니다. 그리되면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억누르던 주변 강대국 민족들이 주님의 빛과 영광을 향하여 경배하러 오리라고도 예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경배하러 올 민족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비추시는 정의와 평화의 빛을 받아 반사하듯이 그들에게 비추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참조: 시 72편, 화답송). 대림 시기 전례의 어법으로 해석하자면 여기서 ‘예루살렘’은 그 동안 평화를 빼앗겨온 우리 한민족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⒊ 일어나 빛을 비추신 예수
마치 이사야 예언을 실현하시려는 듯이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한가운데에서 일어나 빛을 비추셨습니다(公顯). 첫 공현은 동방 박사들이 찾아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이들이 베들레헴으로 경배한 일은 요셉과 마리아 부부로 하여금 놀라기도 했으려니와 과연 이 아기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이시라는 확신을 주었을 것입니다. 만삭의 마리아와 요셉을 멸시하며 박대했던 베들레헴 주민들도 범상치 않은 인물이 태어났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겠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사실을 한동안 모르다가 아마 예수님께서 장성하신 후에 알게 되었을 텐데, 그 때가 세례자 요한에게로 가서 요르단 강에서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으셨을 때입니다. 아마도 하늘에서 울려오는 소리 덕분에 요한과 그의 제자들과 거기에 모여 있던 군중이 알게 되었을 것이고,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을 일으키신 덕분에 특히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등 함께 갔던 제자들과 잔치에 왔던 손님들이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공현 대축일의 복음도 예수님의 세례 사건, 동방 박사들의 경배,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번갈아 읽습니다.
⒋ 평화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요한 23세는 평화에 관해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여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회칙으로 발표했으니, 그것이 「지상의 평화」입니다(1963년). 현대의 국제 질서는 국가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국가 주권 사상이 대세입니다. 바벨탑 시대 이래로 세상은 힘을 가진 집단이 약한 집단을 넘보고 괴롭하는 약육강식의 질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그야말로 무법천지입니다. 국가들의 질서에는 보편적인 공동선의 질서가 아직도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릇 질서는 하느님 창조의 방식이고, 무질서는 아직 창조되지 못하고 있는 혼돈의 징표임을 감안하면, 평화에 관한 한 하느님의 질서가 아직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이런 혼돈의 상황에서 요한 23세는, “한 국가는 다른 국가에 대해 서로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되며, 국가들 간의 관계는 진리 · 정의 · 적극적 연대 · 자유 등을 존중하며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회칙 「지상의 평화」, 80항)고 가르쳤습니다. 이들 가치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최고선입니다.
⒌ 우리 나라의 현실과 교회의 사명
우리 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약소국으로 살아왔습니다. 백 년 전에는 국권을 빼앗기기도 했고,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자마자 분단되더니 전쟁까지 치룬 채로 평화가 사라진 휴전 상태에 놓여 있으며,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분단국가로서 남북한은 평화를 회복해야 할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불과 5년 전에 한반도는 미국과 북한이 서로 전쟁일보 직전까지 치닫는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뜻과 상관없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 이는 국가의 주권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군사 주권인 전시작전통제권이 우리 나라 대통령에게 있지 않고 미군 사령관에게 있는 현실에서 잘 드러납니다. 미국이 하고자 하면 언제든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 있고, 우리 나라는 원하지 않아도 이 전쟁에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 참담한 처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를 위한 유효한 수단은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회복하고자 하는 대한민국의 여론밖에 없습니다.
어제 새 해 첫 날이었던 평화의 날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담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평화의 진리가 있습니다. 평화는 무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발전을 통해서 이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기는 기껏해야 쳐들어오는 적을 막을 수 있는 전쟁억지수단에 지나지 않지만 발전을 위한 대화와 교육과 노동 구조는 평화를 적극적이고 확실하게 확보할 수 있는 평화 창조의 수단이라는 점입니다.
세대 간의 대화는 물론 남북 동포 사이에 대화를 촉진하고, 이 대화의 주제가 남녘은 물론 북녘에서 인간 발전을 위한 교육의 이념과 국가가 책임지는 교육구조와 정책을 논하며, 또 남북 간 경제교류를 통하여 빈부격차를 줄일 수 있고 일자리를 늘릴 수 있는 노동 구조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야말로 민족 평화의 지름길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에게는 이렇듯 질서있는 평화의 여론을 선도함으로써 한민족이 평화를 그 빛을 인류에게 비추어주어야 하는 평화 창조의 사명이 주어져 있고, 이는 평화를 질서있게 이룩함으로써 최고선의 진리를 드러내는 공현의 사명입니다. 그 옛날 동방박사들이 구세주를 찾아와서 경배하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쳤듯이, 우리 교회는 평화를 주시려는 구세주의 약속을 믿고 일어나 비추라는 예언자의 외침에 따라 우리 민족에게 평화를 되찾아주려는 노력을 봉헌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세주께 드려야 할 경배이며, 일어나 비추어야 할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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