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묵상글

한국의 초대교회, 풍수원 성당과 정규하 신부

수성구 2021. 4. 26. 03:11

한국의 초대교회, 풍수원 성당과 정규하 신부

한국의 초대교회, 풍수원 성당과 정규하 신부

 

사도 9,31-42; 요한 6,60-69 / 2021.4.24.;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인 사도행전 9장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던 초대교회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생명을 주시는 말씀을 중심으로 흩어지지 않고

리따에서 병자를 고쳐 주며 심지어 야포에서 죽은 사람도 살리는 기적도 일으키면서,

이스라엘 곳곳에서 초대교회를 개척했던 것인데, 이는 말씀은 영으로서

생명을 준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행한 결과였습니다.

이 땅에서도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 이후 세 번째로 서품된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강원도 풍수원에서 복음을 전파했으니, 이것이 백 년의 박해에서 살아남은

한국 천주교회의 초대교회였습니다.

 

풍수원은 경기도에 인접한 강원도 초입의 산골짜기로서 일찍이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 신태보 베드로가 박해를 피하여

그 이전의 박해에서 살아남은 교우들을 이끌고 첫 교우촌을 일군 마을이었습니다.

신유박해 당시에 많은 양반 교우들이 떠나갔지만 복음에 매료된 신태보 베드로는

박해에서 살아남은 치명자들의 가족을 찾아 복음과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가

그들과 함께 용인에 살던 치명자 가족들을 이끌고 강원도 풍수원으로 이주하여

40여 명의 신자들로 한국 최초의 교우촌을 꾸렸습니다.

신태보는 치명자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한편 교리서를 100여 권이나

필사하여 나누어주면서 복음 진리와 그리스도 신앙을 이어가도록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이후 1896년 강도영, 강성삼과 함께 조선 천주교회의 세 번째 사제로 서품된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부임할 때까지 80여 년 동안 성직자 없이

평신도들만의 교우촌이 풍수원에 생겨났습니다.

 

정규하(1863~1943)는 충청도 아산의 남방제 마을 동래 정씨 친척들로 이루어진

교우촌 출신이었고, 용산 성심신학교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제로 서품되어

풍수원 성당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았는데, 본당신부가 된 첫 한국인 사제였습니다.

당시 일본 낭인들에 의해 민비가 시해되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 사건으로 인해 일제에 항거하고자 하는 의병 조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풍수원 성당에도 일본군에 쫓겨온 의병들을 피신시켜 주었습니다.

이 의병들과 본당 신자들을 더 모아서 정규하는 성당의 사랑방에서

삼위학당(三位學堂)을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논산에서 초빙해온 교사

박토마를 통해 한글과 수학 등 신학문과 역사 과목 그리고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에는 이 삼위학당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강원도에서는 처음으로 횡성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 삼위학당은 해방 후 광동초등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98년에 이르러

학생 수가 부족해지자 폐교되기까지 유지되었습니다.

 

당시 풍수원 본당이 관할하던 구역은 화천과 인제, 양구, 홍천 등 강원도 전역과

경기도 일부를 포함하여 12개 군에 걸쳐 29개 공소였고 신자 수는 2,000여 명에

달했는데, 천진암 강학회와 이승훈의 영세 이후 세례받은 권일신에 의해

조선 최초로 형성된 교우촌이 세워진 양평까지 관할하였습니다.

초대 주임이었던 프랑스 선교사 르메르 신부가 초가집 12칸으로 쓰고 있었던

성당을 증축하고자 정규하는 서울의 명동 성당을 본떠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1910년에 성당을 건립하였으니 강원도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세워진 풍수원 성당이

모체가 되어 강원도 각지로 본당이 분가되어 나갔습니다.

정규하 신부는 풍수원 본당 사목 활동으로서 여성 신자들을 모아 기도와

교리 공부와 어려운 이웃을 도와 봉사하는 모임인 성부안나회(聖婦安那會)

설립했는데 이들 중에는 수녀가 되고 싶어 하는 신자들도 있어

이들이 그 모임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죽은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선종 봉사 모임과 고아들을

돌보는 성영회(聖嬰會)도 조직되어 있었으며, 사제성소를 계발하여

재임 중 6명의 사제를 배출하였고, 성체성혈대축일에 성체현양대회를 실시하는 등

강원도 전 지역과 경기, 충청 지역에 이르기까지 본당 사목의 전형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춘천과 원주 교구 합동으로 해마다 풍수원 성당에 모두 모여

1920년에 시작되었던 성체거동행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번듯한 성당이 세워진 다음에는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이 많이 찾아왔는데,

침술에 조예가 깊었던 정규하는 이들 중에 병을 앓고 있던 이들을 치료를 해 주었고

이에 대한 소문이 나자 경상도 지방에서도 난치병으로 고생하던 환자들까지

찾아와 치료를 받기도 하였으니, 풍수원에서 사목한 기간만 해도 47년입니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1세대 사제를 대표하는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의 이런

사목활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와 프랑스 선교사 출신 주교의 정교분리

노선으로 인하여 정치적으로 암울하던 시기에서 민족 주체성을 고취하기 위하여

긴장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한 박해는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해도 유학을 유교로 신봉하던 지방 유지들은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천주교를 바라보는 가운데 매년 석달 동안은 강원도 전 지역과

경기도 및 충청도 일부를 포함하는 관할 지역내 모든 공소를 순방하며 신자들이

성사를 배령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특히 삼일 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해서는

이를 노골적으로 거부하던 이방인 출신 주교와 이를 어떡해서든 참여하려던

방인 사제 및 신학생들 사이의 중재역을 맡기도 하는 귀감을 보였습니다.

정규하 신부는 나라 안팎과 교회 내외부의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이루어진 말씀 안에서 살아가면서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또 한 사람의 사도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