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묵상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수성구 2021. 4. 20. 02:01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6,8-15; 요한 6,22-29 / 2021.4.19.;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이기우 신부

 

무릇 길이 막히면 뚫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소통할 수 있는 통로도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솟구쳐서 던지는 질문을 모처럼 받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그런가 하면 독서에서는 백성이 하느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유다교 당국에 대하여 스테파노가

거침없이 그 길을 뚫으려고 하니까 여지없이 박해를 가하려고 하는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또 하느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셨는가 하면,

독서에서는 스테파노가 반대자들로부터 이스라엘의 율법을 거스르고 관습을 뜯어 고치며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거룩한 성전’을 허물 것이라는 고발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고 말씀하시며,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신 당신을 믿으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최후의 만찬 기사의 배경이 될 이 말씀은 성체성사를 강하게 암시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생명의 양식으로서 예수님을 받아먹는다는 것은

그분처럼 자기 자신을 바치는 참된 제사를 하느님께 직접 바치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었던 전통적인 유다교와 유다교 제사를 근본적으로

문제시하고 전혀 새로운 형식과 방식으로 백성이 직접 하느님을 섬기도록 가르치는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교에서는 인신공양 제사를 공공연히 자행하던 우상종교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야만적인 지경은 벗어났다고 해도 사람 대신 동물을 불태우는 번제로 만족하고 있었으며,

이 제사에 바쳐진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음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하느님께 바쳐 드리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인격적으로 하느님과 소통한다는 일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을 하는 일로 구분하여 사회적 신분을 나누고

이로써 인간을 차별하는 관습을 정당화시키고 있었습니다. 제사를 독점하고 율법 지식도

독점한 상태에서 보통 유다인들은 그저 사두가이들이 정해 놓은 규칙대로 번제를 드리고

또 바리사이들이 가르치는 대로 율법을 지키는 데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과 백성이 소통할 수 있는 통로는 꽉 막혀 버린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은 예수 부활에도 불구하고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신앙에 불타 있었던 스테파노는 부제이면서도 곧이곧대로 복음을 선포하고 신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가르치며 교회 바깥의 유다인들에게도 서슴없이 회개하라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기성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고 나서야 가까스로 사도직에 나섰던 데 반해서 스테파노는

제자로서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았지만 성령이 충만했던 덕분에 사도들보다

더 용감하게 예수님의 길을 걷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는 스테파노를 박해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달라지지 못하고 여전히 고루한 유다교의 모습을 거듭 확인합니다.

조상 대대로 하느님을 믿어 왔다고 해도, 또한 율법을 아는 그 복잡한 지식이 해박하다고 해도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소통 통로가 꽉 막혀 버린 이 사태의 본질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완고한 모습,

즉 진실함도 없고 개방성도 없이 아집과 기득권에 갇혀 있는 영혼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스테파노 부제에게서 보듯이, 인간 존재의 고유성과 위대함은 영혼의 진리에게서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부어주신 영과 소통하는 사람의 혼은 누구나 위대한 가능성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일이 복음선포요 또한 교육인데,

이 가능성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닫게 해 주는 일이 특히 신앙 교육입니다.

이는 외부에서 지식을 주입시키는 작업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야겠다는

자각이 내면에서부터 일어나도록 촉매 작용을 하면서 기다려주는 일입니다.

인격적인 존중과 배려는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사물과 미래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갈증도 생겨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등에 대해

질문을 하는 변화가 가능해집니다. 지식과 경험 그리고 깨달음에 의한 답변은 이때 해 주면 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에 의해서 빵의 기적을 체험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르침을 들은 유다인들이 그분께 던진 물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예수님께서는 모처럼 군중으로부터 받으신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

즉, 하느님의 일이란 예수님의 삶과 가치와 의미를 마치 빵 먹듯이 수용하여

하느님의 기운을 수용하는 일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당신 자신을 바치셨듯이,

우리도 자기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참된 제사를 드리는 일까지가 하느님의 일입니다.

이것이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입니다.

 

이 진리를 일찌감치 깨달은 아나빔들이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한 바 있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시편 119,1. 화답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