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Vincent and a Donor-UNKNOWN MASTER, Spanish
1450-1500. Panel, 185 x 117 cm. Museo del Prado, Madrid
축일:1월 22일
성 빈첸시오 부제 순교자
St. Vincent the Deacon
St. VINCENT of Saragossant
San Vincenzo di Saragozza Diacono e martire
at Heusca - martyred c.304 at Valencia
Vincenzo = vittorioso, dal latino
성 빈첸시오는 사라고싸의 주교이신 성 발레리오의 제자로서 품을 받고
백성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치는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던 중에
그당시 스페인의 집정관인 잔인한 박해자 다치안의 명에 의하여 순교한 것이다.
디오클레시아노와 막시미아노는 303년 경에 크리스챤 성직자를 반대하는 제 2, 제 3의 칙서를 반포했고,
연이어 평신도 박해 칙서가 나왔던 것이다.
빈첸시오의 순교 전에 이미 사라고싸에서는 18명의 순교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교 발레리오와 함께 순교할 결심을 단단히 한 후, 온 갖 고문을 받았다.
다치안은 산송장이 된 그의 육신을 활량한 들판에 던져 버림으로써 맹수와 독수리의 밥이 되게 한 것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순교자들을 통하여 계속 승리하십니다."
이 구절은 시인 푸루덴치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훌륭한 순교자인, 성 빈첸시오를 기념하여 부른 찬미가의 일부분이다.
발레리오 주교의 오른팔로서 교구내의 모든 행정, 자선사업을 도맡아 운영하였던
사라고사 지역 교회의 부제인, 빈체시오는 확고한 믿음의 증거자였다.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 재위 당시 발렌시아에서 있었던 그의 순교는 상당히 극적이고 처참하였다.
그의 신앙은 동방과 서방세계에 즉시 퍼져, 수많은 민중들의 귀감이 되었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축일:8월28일.인창동성당게시판1336번.
*사라고사의 성 발레리오 주교 축일:1월28일.
사라고사 교회의 부제였던 빈첸시오는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의 박해 시 혹독한 고초를 당한 후 스페인의 발렌시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에 대한 신심이 온 교회에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성 아우구스띠노 주교의 강론에서
(Sermo 276,1-2: PL 38,1256)
빈첸시오는 세상을 쳐 이기신 분 안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라고
사도 바울로는 말합니다.
빈첸시오 부제는 이 두가지 은혜를 받아 두 가지 모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느님에게서 이 은혜들을 받지 않았더라면 자기 힘만으로는 자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말할 때 용기를 지녔고 고난당할 때 인내심을 지녔습니다.
따라서 말을 하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말아야 하고
유혹을 당하는 사람은 자기 힘을 신뢰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을 슬기롭게 하기 위해선 우리의 지혜는 하느篤“獨?와야 하고,
어려움을 용감히 견디어 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내심도 하느님에게서 와야 합니다.
주 그리스도께서 복음서에서 제자들에게 해주시는 권고를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순교자들의 임금으로서
당신의 군사들들 영적 무기로 무장시키시고 그들이 맞아야 할 투쟁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도와주시고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리라." 하고 말씀하셨지만,
즉시 그 들의 두려움을 해소시켜 주시고자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덧붙이셨습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빈첸시오가 세상을 쳐 이기신 분 안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무엇이 놀랍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리라."고 하셨지만 이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즉, 고난이 우리를 짓밟는다 해도 우리를 부서뜨리지 못하고 우리를 공격한다 해도
우리를 이겨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군사들을 거슬러 두 가지의 공격 전략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를 속이려고 아첨을 부리고 또 우리를 부서뜨리고자 겁을 줍니다.
우리의 쾌락이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고 다른 이들의 잔혹성이 우리를 겁주지 못한다고 할 때
세상은 패배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쾌락과 잔혹성이라는 이 두 가지 공격을 당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맞으러 나오시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패배당하지 않습니다.
이런 공격을 당할 때 고난 가운데 인간이 보여 주는 그 인내심은 놀라운 것이지만,
그것을 일으키는 하느님의 권능을 생각하면 그건 당연한 일이 됩니다.
순교자의 몸에 잔인하게 가하여지는 고통이 큰 만큼 그의 목소리에 나타나는 평온도 그만큼 컸습니다.
그의 팔과 다리에 잔인 무도하게 가해지는 고문이 심한 만큼
그가 하는 말에서 드러나는 확신도 그만큼 강했습니다.
빈첸시오가 고난을 당할 때 고초를 당하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형제들이여, 정말 그러했습니다. 그때 분명히 그러했습니다. 말하는 이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서에서 당신의 증인들을 투쟁에 대비시키실 때 이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너희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아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주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육신은 고난을 당하고 영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의 말씀으로 불경건은 패배당했을 뿐만 아니라 나약성은 굳세어졌습니다.
(가톨릭홈에서)
빈첸시오라는 이름을 가진 성인 중에서 가장 오래된 사람으로는 사라고사의 성 빈첸시오 순교자이다.
그는 교회 초기에 있어서 유명한 세 부제 중 한 사람인데,
최초의 순교자 성 스테파노나 성 라우렌시오와 같이 부르며,
스페인 최초의 성인 중의 한사람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빈첸시오는 4세기의 말경 스페인의 사라고사에서
귀족원 의원(貴族院議員))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았다.
사라고사의 주교이신 성 발레리오의 제자로서 품을 받고 백성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치는 직분을 맡고 있었다.
그의 우수한 덕과 경쾌한 웅변은 잠깐 사이에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를 마치 독사와도 같이 미워하던 총독 다치아노는
제일 먼저 그를 주목하고 주교와 더불어 이들을 법정에 가두었다.
그때는 마침 디오클레시아노 황제의 무서운 대 박해 중이었으므로 그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스페인의 총독 다치아노는 더욱 잔인하게 신자들을 학살했던 것이다.
발레리오 주교와 빈첸시오는 철사로 결박되고 사라고사에서 호송되어, 발렌시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막상 총독 앞에 끌려나갔을 때, 이미 연로한 주교는 여러 말을 할 수 없어서,
젊은 빈첸시오가 혼자 응답하며 당당히 그들의 신앙을 선언한 결과 이 두 사람 중 주교는 추방되고
그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총독은 그의 배교를 재촉하기 위해 모든 참혹한 형벌을 가했다.
쇠갈퀴로 그의 살점을 떼어낸 적도 있었고, 혹은 쇠 석쇠에 올려놓고 및에서 불을 지른 때도 있었다.
또한 벌겋게 달군 쇠찬을 살에 대고, 거기에 고통을 더 느끼도록 상처에 소금을 바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빈첸시오는 어떠한 형벌을 받아도 결코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의 설명서를 바쳐라. 그렇게 하면 용서해 주리라.”
형벌을 하다 못해 총독은 갑자기 방법을 달리해 자비심을 베푸는 것 같이 했으나,
성스러운 부제는 그 말에도 복종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직 인쇄술이 발명도 되지 않았고,
서적에 적었던 그 당시로서는 특히 귀중한 종교 서적을 박해자에게 내놓는다는 것은
믿음을 버리는 것과 같은 죄였기 때문이었다.
신앙 서적을 모두 태워 그리스도교의 근절을 도모하려던 총독의 계획은 또다시 수포로 돌아갔다.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의 굳으 결심을 꺽을 수가 없다고 판단한 총독은 형벌 주는 것을 중지하고
빈첸시오를 철의 파편이 흩어져 있는 감옥에 처넣었다.
성 빈첸시오가 받은 고통은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하는 것과 같이
자연계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종류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 참아 이긴 것은 확실히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 빈첸시오의 수난’이라고 이름 부인 순교록을 보면, 그의 감옥에 아름다운 광채가 충만히 비치고,
그와 동시에 천사가 나타나서 그를 위로하고 승리의 월계관을 약속했다 한다.
그리고 이것을 목격한 간수는 무서움에 못 이겨, 마침내 개심하여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형벌을 가하는 것을 단념한 총독은 갑자기 수단을 바꾸어, 이번에는 쾌락으로서 유인하려고
성인을 아주 기분 좋은 침대에 눕게 하고 간곡히 위로했으나,
빈첸시오는 오래지 않아 그 씩씩한 영혼을 하느님께 바쳤다. 때는 304년 1월 22일이었다.
총독은 끝까지 이 거룩한 순교자를 욕되게 하기 위해 그 유해를 바다에 던졌지만,
파도로 인해 육지로 휩쓸려 온 것을 신자들이 발견하고 찬미속에 정중히 매장했다고 한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스페인의 사라고사에서 그의 친구인 성 발레리우스에 의해 부제가 된 그는
303 년 크리스천 박해 때 발렌시아 감옥에 갇혔다.
이 감옥에서의 굶주림과 고문이 그의 신앙을 꺾을 수는 없었다.
불가마 속에 들어간 소년들처럼 그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활기에 넘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가혹한 고문과 박해는 점차로 박해자 다치아노 자신의 몰락을 가져왔다.
빈첸시오는 끝내 고문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고문하는 사람들을 지치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다치아노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타협안은 빈첸시오가 황제의 칙령에 따라 성서를 포기하고 불에 태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빈첸시오는 또다시 더러운 감방에 쳐넣어졌지만 오히려 간수를 회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