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축일:1월17일/성 안토니오 아빠스

수성구 2014. 1. 15. 16:18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죄의 용서와 치유가 내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이 구원이 드러나는 자리임을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우리 삶에서 구원을 가장 직접적으로 실감하게 되는 사건은 바로 용서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았음을 깊이 깨닫고, 그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다른 이를 용서하는 행위를 할 때 우리는 구원을 실제로 살게 됩니다. 그 반면에 용서의 어려움을 체험하고 심지어 용서가 불가능하다고까지 느끼는 순간, 주님의 온전한 구원과 치유에 대한 믿음 역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지난 가을에 본 연극 한 편의 강한 인상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러시아의 한 극단이 영국의 유명한 연출가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공연한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폭풍우)였습니다. 놀라운 연기와 신선한 연출에도 감탄했지만 무엇보다도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에서 남긴 ‘용서’라는 주제를 다시 음미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연극의 뒷부분인 에필로그에 나오는 주인공 프로스페로의 마지막 대사는 용서만이 인생의 행복을 다시 찾는 길이라는 작가의 마지막 확신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부릴 정령도 없고/ 걸 수 있는 마술도 없고 해서/ 기도로 구원되지 않는다면/ 저의 마지막은 절망이 됩니다./ 기도는 뚫고 들어가 자비를 움직여서/ 온갖 잘못을 용서합니다./ 여러분도 죄를 용서받으시려거든/ 관대하게 저를 놓아주십시오.”
우리는 용서가 때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는 것과, 그러나 용서하지 못한다면 행복할 수 없다는, 이 두 가지 모순된 사실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프로스페로에게 용서가 삶을 건 도전이었듯이 우리에게도 용서는 그것을 감행할 용기를 요구합니다. 그것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어 우리가 온전하게 치유받고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그분을 바라보면서 걷는 우리의 삶이라면, 용서의 힘은 분명히 우리 안에 소리 없이 자라나 있을 것입니다.

 

//

 

 

 

 

 

The Virgin and Child with Saints George and Anthony Abbot-PISANELLO

mid 1400s. Panel. National Gallery, London

 

축일:1월17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Sant’ Antonio Abate

Saint ANTHONY the Abbot

Anthony of Egypt; Anthony the Great; Father of Cenobites;

Father of Western Monasticism

251 at Heracleus, Egypt -

356 at Mount Colzim of natural causes; relics near Vienne

Antonio = nato prima, o che fa fronte ai suoi avversari, dal greco

Name Meaning :inestimable

 

 

Saint Anthony Abbot and Saint Bernardino of Siena,-Jacopo Bellini

1459/1460. Partial Gift of an Anonymous Donor,

in Honor of the 50th Anniversary of the National Gallery of Art

 

성 안토니오는 수도 생활의 창시자로 공경받는다.

왜냐하면 그가 처음으로 은수자들을 한데 모아서 다소 산만한 형태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고, 그들에 대하여 어떤 권위를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고독하고 한적한 독수 생활을 오랫 동안 계속하였다.

 

그는 20세 때부터 남부 에집트의 고향 근처 산을 찾아다니면서 고독한 생활을 즐겨하면서, 기도와 연구 및 자급자족을 위한 노동을 해왔다.

그러다가 그는 맹렬한 영적 육적인 유혹으로 한 동안 고생하였으나, 끝내 이를 극족한 뒤에, 그 주위에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고 전한다.

 

312년에 그는 좀더 멀리 갔는데, 콜짐 산의 동굴에 거처하였다고 한다.

이 산은 홍해의 북서해안에 있는데, 이곳이 그의 여생을 보낸 장소였다.

여러가지 소망을 지닌 사람들이 성 안토니오를 찾아와서 충고를 청하고, 또 어떻게 사는지를 살피러 왔다.

 

말년에 그는 아리우스파의 반대를 촉구하기 위하여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만일 전승이 옳다고 한다면, 그가 사망하였을 때 그의 나이는 100세가 넘었다.

성 안토니오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가 전해진 이유는 그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 지내던 성 아타나시오가 기록한 전기가 전하여 내려오기 때문이다.

 

이 책을 보면, 사막의 은수자들이 환상이나 혹은 무모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람임과 동시에 학문이 뛰어났으며, 하느님을 섬기는 생활이 엄격하였다고 한다.

 

*시에나의 성베르나르디노 사제 축일:5월20일.게시판1169번,1772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성 안토니오는 생전이나 사후나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공경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하느님의 종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성 안토니오는 "사막의 교부"로도 불린다.

그의 휘장으로 묘사되는 그림은 돼지와 종이다.(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Madonna and Child with Saint Anthony Abbot and Saint Sigismund-Neroccio de’ Landi

c. 1495.Samuel H. Kress Collection

 

안토니오의 생애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와 매우 비슷하다.

20세에 그는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복음의 메시지에 깊이 감동되어

자기가 상속받은 많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가 프란치스코와 다른 점은 생애의 대부분을 광야에서 보냈다는 점이다.

 

그는 이 세상이 완전히 유혹에 덮인 것을 보고 세상과 교회에 광야의 은수 생활을 통해 크나큰 자기 희생과 기도의 모범을 보이고자 했다.

그러나 어떠한 성인도 반사회적인 인물은 없듯이 안토니오도 영적 치유와 인도로써 많은 사람을 자기에게 끌어들였다.

그는 54세에 많은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은수자들의 거처를 바탕으로 일종의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311년에 다시 시작된 로마 박해 때 순교하고 싶은 열망에서 두려움 없이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 도움을 베풀었다.

그는 88세에 수세기가 지나서야 교회가 그 소용돌이에서 헤어날 수 있었던 커다란 비극인 아리우스 이단과 싸웠다.

 

 

안토니오는 예술에서 T형의 십자가, 돼지 그리고 책으로 표현된다.

돼지와 십자가는 마귀의 무서운 투쟁을 상징한다.

십자가는 계속해서 악령을 제어하는 힘을 주는 방법이고, 돼지는 마귀의 상징이다.

 

책은 ?인쇄된 말마디보다는 ’정신의 책’을 더 좋아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안토니오는 105세에 광야에서 죽었다.

우리는 안토니오의 놀라운 극기 생활에 잘못 인도되지 않는다면,

모든 그리스도인 삶의 의미와 결과를 강조하고자 한 안토니오 성인전을 쓴 작가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것이다.

 

"초면인데도 그의 얼굴에 나타난 기쁨을 보고 제자들 가운데서 그를 알아보았다."

위대한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까지도 그에게 기도를 청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안토니오는 그의 친구들에게 말했다. "황제가 나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고 해서 놀라지 말 것이다.

그도 나와 같은 한 인간에 불과하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글을 써 보내셨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에 놀라야 한다."

 

 

 

Saint Anthony the Abbot Tempted by a Lump of Gold-ANGELICO, Fra

c. 1436. Tempera on panel, 19.7 x 28 cm.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수도 생활의 탁월한 사부인 안또니오는 250년경 에집트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세상을 떠난 후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막으로 들어가 회개 생활을 시작했고 많은 제자들을 얻었다.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의 박해 시 신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고,

아리우스 이단자들을 거슬러 싸우던 성 아타나시오를 후원해 주면서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356년 세상을 떠났다.

 

 

Temptation of St. Anthony-Giovanni Girolamo Savoldo

1515-20 (?)oil on panel 27-3/8 x 47 in.

 

성 아타나시오 주교가 쓴 [성 안또니오의 생애]에서

(Cap. 2-4: PG 26,842-846)

 

성 안또니오의 소명

 

양친이 세상을 떠나자 안또니오는 나이 어린 여동생과 함께 단둘이 남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여덟 내지 스무살 정도였고 가사와 여동생의 양육을 책임 맡게 되었다.

 

양친이 세상을 떠난 지 반년도 채 못되어, 늘 하던 대로 주일 날 한번은 성당에 가던 길에 다음과 같은 생각이 머리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즉, 무엇 때문에 사도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구세주를 따랐는가?

또 사도행전이 말해 주는 대로 무엇 때문에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자기 재산을 팔아 나온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사도들의 처분에 맡겼는가?

그는 또 이런 생각도 했다. 그들이 하늘나라에서 얻으리라고 희망한 상급은 얼마나 크고 위대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성당에 들어갔다. 그때 막 다음의 복음 말씀이 봉독되고 있었고, 그는 주님이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을 듣게 되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안또니오는 마치 성인들이 한 것을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상기시켜 주시고 또 그 성서 구절이 특별히 자기를 위해 봉독된 듯,

즉시 성당에서 나와 자기가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소유지가 자기 자신과 여동생에게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그 전부를 마을 사람들에게 주어버렸다.

그는 약 37만평 정도의 비옥한 토지를 갖고 있었다.

또한 동산 전부를 처분하여, 거기에서 받은 액수에서 약간만 여동생을 위해 남겨 두고, 상당한 액수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다음 번 성당에 갔을 때, 복음서에 나오는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이제는 더 견디지 못하고 성당에서 나와 남겨 둔 재산까지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 버렸다.

자기 여동생을 잘 알고 있던 믿을 만한 동정녀들의 보호에 맡기고 그들의 집에 들여보내어 교육받도록 했다.

그리고는 자기 집 근처에서 고행 생활을 하였다. 그는 몸바쳐 반성하는 가운데 엄격한 생활을 인내로이 해나갔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성서의 말씀을 기억하여 그는 손수 노동을 했다.

그리고 자기가 번 수입 중에서 약간은 식량을 구입하는 데 쓰고 나머지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다.

 

그는 또 "은밀히 기도하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에 따라 기도에 오랜 시간을 보냈다.

성서를 너무도 열심히 읽었으므로 읽는 것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외우다시피했다. 그래서 훗날 자기가 암기 한 것이 책 노릇을 해주었다.

 

그 지방의 모든 사람들과 그가 전에 사귀었던 좋은 사람들은 그를 "하느님의 벗"이라 불렀고,

어떤 이들은 그를 아들처럼, 또 어떤 이들은 형제처럼 사랑해 주었다.(가톨릭홈에서)

 

*성 아타나시오 주교 축일: 5월2일.게시판 1137번,1742번

 

 

Sts Paul the Hermit and Anthony Abbot-VELAZQUEZ, Diego Rodriguez de Silva y

c. 1642. Oil on canvas, 257 x 188 cm. Museo del Prado, Madrid

 

이미 말한 성 바오로 은수자와 같이 로마 제국의 박해 시대에 광야로 피신해 홀로 고독히 하느님과 같이 은수 생활을 한 사람은 여럿 있으나,

그러한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서 공동으로 수도 생활을 하기 시작한 이는 성 안토니오 은수자였다.

그러므로 이 성인을 공동체 수도 생활의 스승 혹은 시조(始祖)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 바오로 은수자 축일:1월15일.게시판1570번

 

 

 

성 안토니오는 251년 이집트의 고만에서 태어났다.

가정은 부유해 입신 출세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세상의 허무함을 깨달은 그는

예수의 "당신이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당신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오"(마태 19, 21)하신 말씀을 글자그대로 실행하려고 결심했다.

 

양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유산의 절반을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주고 그녀를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기고 나서,

자신은 사막(沙漠)에 들어가 어떤 노수사의 지도하에 완덕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얼마동안 덕을 닦고 난 뒤 안토니오는 더욱 외부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은사의 슬하를 떠나 더욱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 무덤과 같은 굴에 살면서 오로지 노동과 기도로써 경건히 날을 보냈다.

 

그러나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1베드 5, 8)하신 말슴과 같이 악마는 열심한 안토니오를 그냥 두지 않았다.

어떤 때는 세상의 쾌락에 대한 상상이나 동경심(憧憬心)을 일으켜 주고, 어떤 때는 이런 은수 생활은 자기를 돌보지 않은 무모한 짓이므로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으니 빨리 세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등 온갖 유혹으로써 그의 거룩한 이상을 방해하려고 했다.

 

그리고 안토니오가 맹렬한 유혹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기도를 더 할수록, 마귀는 더욱 그의 마음을 산란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의 추악한 모양을 그의 눈앞에 그려내고,

어떤 때는 채찍으로 그를 때려 오랫동안 몸과 마음을 괴롭게 했다. 그러나 그는 밤이나 낮이나 항구히 마귀와 싸워 결코 마귀의 유혹에 떨어지는 때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 그에게 성스러운 평화가 찾아오고 다시 주예수의 형상이 나타났을 때 무한한 즐거움을 누리게 된 안토니오는

"주님, 저 무서운 유혹을 당하는 동안 당신은 어디 계셨습니까? 어찌하여 나를 돌보지 않았습니까?" 하고 공손히 원망 비슷하게 말하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한다.

"안토니오야, 나는 네가 유혹을 당하는 동안 잠시도 네 옆을 떠나지 않고, 네 노력의 여하를 보고 있었다.

이제는 안심하라. 마귀는 이후 절대로 네게 유혹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안토니오를 위해 생활을 보살펴 준 이는 그의 친한 친구였다.

그는 안토니오가 만든 성물들을 시장에 가서 팔아 그 돈으로 필요한 양식을 사고 나?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필연코 이 친구로 인해 전해졌겠지만 오래지 않아 성 안토니오의 감탄할 만한 일상 생활이 사방에 퍼지자,

수도(修道)생활에 희망을 품은 청년들이 계속 찾아와서 그의 지도를 받았다.

안토니오는 혼자서 운수 생활을 하는 것보다 공동으로 생활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더 적합하리라는 생각으로 기쁜 마음으로 그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들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 뿐 아니라, 이번에는 관리나 상인이나 그밖에 여러 계급에 있는 사람들이 완덕의 생활을 그리워하면서,

지금은 안토니오 산이라고 부르게 된 고르팀 산에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과 더불어 수덕에 전심전력했다.

 

성 안토니오 임종 시에는 이와 같은 살마들이 그의 덕을 사모하여 찾아와서 영성상에 관한 지도를 받거나 안토니오 및 제자들의 기도를 청햇다.

그 중에는 콘스탄타노 대제와 두 황태자도 끼어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도 대제(大帝)는 사막까지 가지 못할 경우에는 편지로써 안토니오의 기도와 회답을 청했고,

성 안토니오는 이에 대해서 올바른 정치를 행하며, 가난한 이를 구제해야 될 것을 권면했다고 한다.

 

성 안토니오는 104세의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성 아타나시오를 위해서 일반 민중의 청원을 듣고,

그 읍에 가서 아리우스파의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설교를 했는데,

그 고결한 풍채에 접하고 그 이치 있는 말씀에 감동되어 진리의 길로 돌아선 이는 참으로 많았다.

이와 같이 사명을 마친 성인은 세 번째 정이 든 사막에 돌아가서 오래지 않아 거룩한 일생을 마친 것이다.

그때 그는 105세였었고 유해는 제자들로 하여금 정성되이 매장되었다.

성 안토니오는 "사막의 교부"로도 불린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아리우스주의 
[라틴어]Arianismus 
[영어]Arianism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4세기경의 이단사상.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로부터 발단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신 안에 있는 세 개의 위격은 모든 면에서 대등하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부만이 그러하다.
성자는 모든 피조물들과 같이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을 뿐이며, 신으로 불려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단지 피조물과 신의 중계역할을 하고 세상을 구원하도록 신에 의해 선택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의 은총과 선택에 의해 하느님의 양자가 되었으며 그가 죄를 지을 수도 있었으나 짓지 않는 것을 보시자
신은 그의 덕을 예견하고 선택하였 다. 즉 그는 신이 아니라 덕을 갖춘 뛰어난 반신이며 이점에서 성부와 닮았다.
이러한 반 삼위 일체주의적 아리아니즘이 강생의 신비를 단지 수사학적인 문제로 돌림으로써
그리스도교의 근본교리가 해체될 위험에 처하자, 교회는 325년 니체아 공의회를 소집, 아리아니즘을 단죄하였다.
또한 니체아 신경을 발표, 삼위가 모두 성부로부터 났으며
각기 그 자체로서 완전한 신이라는 삼위일체설을 고백하였다.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다시금 고개를 든 아리 아니즘을 단죄하고 니체아 신경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의 후계자들에 의해 북부 게르만 민족들에게 전파되었던 아리아니즘은
게르만족의 로마 진입과 더불어 로마제국 전역에 퍼졌다.
교회는 7세기에 이르러서야 아리아니즘을 몰아내고 정동 교리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삼위일체 대축일(성령강림대축일후 첫번째 주일):게시판1795,1796,1797번.

 


니체아공의회
[라틴어]Concilium Nicaenum 
[영어]Councils of Nicaea 

 

①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년, 제 1차 공의회).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대제에 의해 소집되어 니체아에서 열렸다.

‘318명 사제들의 교회회의’라고 불려졌으나 50~220명의 사제들이 참석한 것으로 보이며

서방에서는 회의를 주재한 호시오(Hosius)를 비롯하여 2명의 교황사절과 5명의 주교만이 참석하였다.

주로 아리우스 이단문제를 다루었다.

황제는 이騈?몰아내고 정통 교리를 세우는 것 보다는 교회 내의 일치를 확보하는 데 급급하였으므로

아리우스 이단의 문제는 공의회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공의회에서는 두편의 신경(信經)이 제출되었는데,

아리우스파(派)인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of Nicomedia)가 제출한 것은 폐기되었으며,

팔레스티나 공동체의 세례 신경을 기초로 하여 ‘동질’(同質, homoousios)이라는 용어를 보완한

 체사리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of Caesarea)의 신경이 채택되어

이를 기준으로 니체아신경이 공포되었으며, 그 결과 4명의 아리우스파가 파문되었다.

부제 아타나시오(Athanasius)도 참석하여 정통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② 제 2차 니체아 공의회(787년, 제 7차 공의회).

성화상(聖畵像)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여황제 이레네(Irene)가 소집하였다.

교황 하드리아노(Hadrianus) 1세는 여왕의 공의회 초대에 대하여 성화상 파괴에 대한

히에리아 교회회의(753년)의 결정을 파기하는 조건으로 두명의 사절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성화상 파괴주의자인 군인들의 폭력(786년)으로 공의회는 예정대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리지 못하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타라시오(Tarasius)의 주제 하에 니체아에서 열렸다.

공의회는 교황의 서한대로 성화상 숭배에 대한 교리를 채택하여 성화상에 바쳐지는 공경은 그 본체로

돌아가므로 절대적인 흠숭은 신에게만 바쳐지는 반면, 성화상은 상대적인 사랑에 의해 공경되어진다고 부연하였다.

이 교리를 공포하는 교령에는 참석한 전원의 서명이 첨가되었으며, 성상파괴주의자들은 파문되었다.

이 밖에도 22개의 교회법이 교칙에 관계되어 제정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세속권위에 의한 성직자의 선출은 무효이며 성직 매매는 단죄받아야 한다.

또한 주교의 허락 없이 사제가 자신의 교구를 떠나는 것,

주교 거주지 또는 남자 수도회에 여자가 머무르는 것 등이 금지되었다. 

 

 


▶ 신경 
[영어]creed 
[한자]信經 
[라틴어]credo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그리스도교 교의(敎義)의 요체(要諦)를 간추려 적은 공식적이고 권위 있는 진술.

처음에는 입교 때 행하던 간단한 신앙고백에서 시작하여 4세기경에 마태 28:19을 따라 차츰 3단락의

단일한 형식으로 정비되면서 니체아신경과 콘스탄티노플신경, 사도신경(使徒信經) 등으로  발달하였으며,

서방에서는 오래 된 로마신경에서 나온 사도신경을, 동방에서는 니체아 공의회에서 인정된 니체아신경을

각각 세례신경으로 체택하였다. 동방교회에서는 5세기말경부터 이미 성찬식 때 신경을 암송하기 시작했으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1014년에 비로소 이것을 채택하였다.  (가톨릭대사전에서)

 

 

◆ 니체아신경 ◆  ~信經  라틴어  Symbolum Nicaenum  영어  Nicene creed  

① 니체아 공의회(325년)에서 아리우스주의(Arianism)를 배격하고 정통 신앙을 수호하기 위하여 채택한 신앙 고백문. 이는 체사레아 또는 예루살렘의 세례 신경을 모체로 하고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는 문구들을 가미하여 만든 것이다. 이 신경은 성삼위에 대한 믿음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성자의 동일실체(同一實體), 그의 강생, 죽으심, 부활을 강조하고 있다.

②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에서 채택한 신앙고백문. 이 신경은 칼체돈 공의회(481년)에서 콘스탄티노플 신경이라고 하여 낭독되었으므로 ‘콘스탄티노플 신경’이라 불려지며, 니체아 신경을 발전시킨 것이라 하여 ‘니체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 또는 간단히 ‘니체아 신경’이라고도 불려진다. 이러한 명칭에도 불구하고 이 신경의 기원에 관해서는 견해가 갈리고 있다. 유력한 견해에 의하면, 이 신경은 니체아 신경과는 본질과 정신에 있어서 동일할 뿐이며, 이 신경을 그의 책(Ancor. 118. 9-113)에서 인용한 에피파니오가 이 신경을 만들고(374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채택하였다. 이 신경은 앞의 ①항의 신경이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동질’(同質, homoousios)이라 표현한 데 대하여 ‘성부와 일체’라고 묘사하며, 성령의 위치와 존재를 확대 설명하고 교회와 성사, 육신의 부활, 영생 등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5세기 시리아에서 성찬의 전례에 도입된 이 신경은 스페인을 비롯하여 서방교회에 전해졌으며 마침내 1014년 헨리 2세의 요청에 응하여 로마에 보급되었다. 오늘날 라틴전례의 미사 통상문에는 이 신경이 포함되어 있다. 

 

니체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

†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하느님에게서 나신 참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아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나이다.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사도신경]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밑줄 부분에서 고개를 깊이 숙인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The Visitation with Sts Nicholas and Anthony - PIERO DI COSIMO

1489-90. Wood, 184 x 189.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복되신 동정마리아의 방문축일:5월31일.게시판1187번,1792번.

*미라의 성 니콜라오 주교 축일: 12월6일.게시판1508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