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축일:1월15일/성 바오로 은수자

수성구 2014. 1. 13. 13:20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 나오는, 소년 사무엘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에서 인상적인 것은, 그가 세 번이나 주님의 목소리를 엘리 사제의 소리라고 착각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우리 각자가 주님께서 부여하신 고유의 소명을 알아듣는 데 겪는 보편적인 어려움이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가끔 이 시대를 사는 나에게는 성경의 인물들과는 달리 주님께서 개인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을 것이라며 답답해하거나 야속해하곤 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대예언자 사무엘 역시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는 응답의 순간까지 착오와 노력의 과정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위로가 됩니다. 구약 시대와 우리 시대 사이의 시간적 간격과 문화적 차이는 당연히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주님께서 내리시는 고유한 소명을 찾으려는 갈망을 가지고 살되, 그 갈망이 분명한 길을 발견할 때까지 때로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포르투갈의 시인이자 사제인 호세 토렌티노 멘도사는 사무엘 예언자의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기 전에”(1사무 3,3)라는 부분에 특히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는 우리가 분주한 세상과 내면의 혼동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놓치고 있는 시기를 지낸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고유한 소명을 밝히는 하느님의 등불은 결코 꺼지지 않은 채 우리를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용기와 인내를 잃지 않고 그분을 향한다면 반드시 그분의 등불을 우리 마음에 점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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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Paul the Hermit-Jusepe de Ribera

Oil on canvas. Louvre, Paris, France

 

축일:1월15일

성 바오로 은수자

St. Paul the First Hermit

St. Paul the hermit

San Paolo di Tebe Eremita

c.230 at Lower Thebes, Egypt -

5 January 342 of natural causes;

grave reported to have been dug by desert lions near his cave who guarded the body;

buried by Saint Anthony the Abbot

Patronage;clothing industry, weavers.

Paolo = piccolo di statura, dal latino(small of stature, from the Latin)

 

 

에집트의 테베 출신인 그는 15세 때에 고아가 되었는데

데치우스 황제의 크리스챤 박?피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숨어다니던 중,

매제가 자기 땅을 가로채기 위하여 자신을 그리스챤으로 고발하려는 음모를 알고 사막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여기서 은수자로 살기로 결심하고, 자신에게 알맞는 은수생활을 고안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성 안토니오 아빠스가 만년의 그를 방문했을 때,

과연 성인은 이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며, 그가 운명했을 때 장사까지 지내주었던 것이다.

 

또한 성 예로니모는 바오로의 전기를 기술했는데, 아마도 113세까지 살았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90년 이상을 은수자의 삶을 살은 것이다.

 

그는 최초의 크리스챤 은수자로 공경받는다.(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 성 안토니오 아빠스 축일:1월17일.게시판887번,1572번
*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축일:9월30일.게시판1394번

 

 

Sts Paul the Hermit and Anthony Abbot-VELAZQUEZ, Diego Rodriguez de Silva y

c. 1642. Oil on canvas, 257 x 188 cm. Museo del Prado, Madrid

 

성 바오로 운수자는 230년경 이집트에서 출생했다.

부모는 그리스도교 신자였고 재산도 많았으므로 아이에게 확고한 종교교육을 시키는 한편 일반 학문도 충분히 받게 할 수 가 있었다.

 

바오로는 15세때에 양친을 잃었다.

게다가 그때 디오클레시아노 황제가 교히를 가혹히 박해했기 때문에 바오로는 이를 피해 누나 집의 소유지에 숨어서 5, 6년간을 살았다.

그러나 이교도였던 매형은 젊은 바오로가 상속받은 많은 재산을 자기 것을 만들려고 그를 법정에 고발하려 했다.

그【?22세인 청년 바오로는 그곳을 피해 광야에 가서 몸을 숨기고 박해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광야의 깊숙하고도 인기척 없는 곳에 큰 바위가 하나 있었다.

그는 그곳을 거처로 삼고 목이 마르면 샘에 가서 신선한 물을 마시고 한창 더운 여름일때는 종려(棕櫚)나무의 잎새 밑에서 쉬었다.

이와 같은 고독한 생활을 하며 기도와 고행으로 잠시 지낸 그는 고독한 생활의 무한한 깊이를 깨닫게 되어

마침내 박해가 끝나서도 일생을 이 광야에서 지내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43세까지 바위 옆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의 열매만을 따먹으면서 살았다.

그러나 그 후에는 엘리야 선지자와 같이 신비하게도 매일 까마귀 한 마리가 물어다주는 반 조각의 빵으로 일생을 보냈다.

 

 

St Anthony Visiting St Paul the Hermit in the Desert-Matthias Grunewald.

1512-1516. Oil on panel. Musee d’Unterlinden, Colmar, France.

 

그가 죽기 바로 전에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로 당시 90세 가량의 고령이었던 위대한 은수자 성 안토니오가 그를 찾아왔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우선 서로 초면 인사를 한 다음,

천상 일에 대한 성스러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노라니

때마침 그 까마귀가 날아와서는 여느때 떨어뜨리던 빵 반 조각이 아니라 한 개의 빵을 떨어뜨리고 갔다.

 

안토니오가 놀라며 까마귀 날아가는 것을 쳐다보고 있으니까 바오로는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감사하신 하느님의 자비심입니다.

저 까마귀는 이미 60년 이상이나 이와 같이 나에게 빵을 반 조각을 가져다주었으나,

오늘은 당신이 오셨기 때문에 빵을 배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그 빵을 먹고 샘의 물을 마시고 나서 하느님의 그 크신 은혜를 찬양했다.

 

 

 

밤에는 두 사람이 소리를 맞춰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아침?되자 바오로는 손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를 위해 임종 기도를 바치도록 당신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청하건대 당신은 아타나시오 주교께 받은 망토를 가져와 주시어 그것으로 저의 유해를 덮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안토니오는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계시가 아니면 그런 망토가 있는지 도저히 그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원하는대로 급히 망토를 가지고 돌아오는 도중에 바오로의 거룩한 영혼이 천사들에게 인도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바위에 가 보니 바오로는 마치 기도하고 있는 것 같이 하늘을 우러러 양손을 펴고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품으로 올라간 것이었다.

 

 

St Augustine, St John the Baptist and St Paul the Hermit-GUERCINO

Oil on canvas. S. Agostino in Campo Marzio, Rome

 

안토니오는 그 유해를 성 아타나시오 주교의 망토로 싼 후 동굴 앞에 모셔 그곳의 종려(棕櫚)나무 밑에 장사 지내려고 했다.

그러나 땅을 팔 기구가 없어서 쩔쩔매고 있을 때 광야에서 사자 두마리가 나타나서 그 억센 앞발로 삽시간에 굴을 파주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기적으로써 그를 도와 주신 것이다.

안토니오는 바오로의 유해를 그 안에 매장하고 나서

종려나무의 잎을 꿰매어 만든 의복을 거룩한 기념품으로 가지고 돌아와 교회의 큰 축일에는 항상 그것을 입었다고 한다.

 

성 바오로가 하늘로 올라간 것은 343년으로 그의 나이 113세였으며 광야에서 은수생활을 한 지 90년에 이른 때였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은수자


외딴 곳에 혼자 사는 수도자 4세기 초부터 특히 동방의 그리스도 교도들에게는 이런 생활이
그리스도교적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방편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동방에서는 흔히 은수생활이 공주 생활보다 높이 평가되었으며
한때 은수사들 간에 극단 적이고 때로는 과도한 내핍생활이 행해졌으나 후대에 교회적 권위가
은수 생활을 지배하게 되었고 은수사들로 하여금 수도원 근처에 살 면서 상부의 지시를 받게 하였다.
서방은 동방보다 은수적 수도생활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나 11세기 및 13-14세기의 영성적 부흥시대에

재등장하였다.
11세기에 설립된 카르투시안 수도회와 카말돌리 수도회는 현재까지
반 은수적 수도생활의 형태를 잘 유지해 오고 있으며 은수사들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카르투시안 수도회:게시판690번,1407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