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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하다가도 틈만 나면 수면위로 떠올라
세간의 이목을 끄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종말론자들입니다.
지난 2000년 대희년을 전후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종말론자들이
우리 사회를 한바탕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예로부터 종교적 심성이 강한 우리 민족이며 또한 종교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우리나라의 풍토여서 그런지 때만 되면
종말론자들의 활개를 칩니다. 그로 인한 피해자들이 속출합니다.
언젠가 제가 목격한 사이비 종말론자들의 서글픈 자화상입니다.
민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인적이 드믄 산속에 날림으로 지은
조립식 기도원 건물이 서있습니다.
허름하고 열악하지만 당분간 숙식을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한 지도자의 인도에 따라 수십 명의 신도들이
일사불란하게 임박한 종말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합류한 사람들은 직장이며 가족들도 모두 뒤로 하고
달려온 사람들입니다. 종말이 눈앞인데 재산이 무슨 소용이냐며
교주에게 몽땅 바쳤습니다. 새벽 6시에 기상한 신도들은
그 다음날 새벽 2시까지 거의 광란에 가까운
연속 집회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토록 고대해왔던 그날이 다가왔습니다.
약속된 정오가 되었지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저녁 6시로 종말이 연기되었습니다.
그러나 6시가 지났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밤 9시, 12시...그리고는 끝이었습니다.
즉시 지도자에 대한 고소고발, 구속이 이루어졌고,
모든 것을 사이비 교주에게 맡긴 사람들의
패가망신이 줄줄이 이어졌습니다.
이래서 종말 신앙에 대한 이해, 정말 중요한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통상 사람들은 ‘종말’을 참혹하고 끔찍한 광경이 벌어지는
무섭고 절망스런 순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종말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종말은 부정적이고 절망적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희망적입니다. 한마디로 장밋빛 청사진의 완성입니다.
왜냐하면 종말은 우리가 그토록 고대해왔던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날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다려왔던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날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대하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습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죽음이 다가오자 설레는 마음,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습니다.
죽음을 절친한 친구요 형제자매처럼 대했습니다.
죽음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죽음을 복된 대상으로 파악했습니다.
한 개인의 종말격인 죽음은 한 인간이
오랜 허물과 나약함의 옷을 벗고 불멸의 갑옷으로 갈아입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인간의 비참 위로 하느님의 자비가
풍성하게 쏟아져 내리는 축복의 순간이 한 개인의 죽음입니다.
한 개인의 종말을 뛰어넘어 언젠가 우리 모든 인류가 맞이할
최종적인 종말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교정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찌 그리 종말에 대해
무시무시하게 설명하신 것입니까?
종말에 펼쳐질 광경을 예수님께서 소개하시는데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홍수, 싹쓸이, 멸망,
불과 유황,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두고...
종말에 대한 무시무시한 설명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편의 강력한 경고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까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들,
그래서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강한 경고장이라고나 할까요.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소중히,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
죄와 부족함,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를 기대하는 것, 언젠가 이 세상이 지나가면
더 이상 울음도 눈물도 없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복을 누릴 것을 굳게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종말 신앙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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