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새벽을 열며

2016년 12월 27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수성구 2016. 12. 27. 05:47

2016년 12월 27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6년 12월 27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1요한 1,1-4

사랑하는 여러분, 1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2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복음 요한 20,2-8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2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쓰지 않거나 안 좋은 기억이 있는 물건은 버려야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버린다는 것이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저 역시 버려야 할 것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옷도 많고, 책도 많고, 서랍을 뒤져보면 제 곁을 떠나야 제 기능을 발휘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버리기가 왜 이렇게 힘들까요? 하지만 더 버리기 힘든 것은 안 좋은 기억입니다. 채근담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남이 내게 베푼 은덕은 잊어서는 안 되고, 남에 대한 원망은 반드시 잊어버려라.”

정말로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대로 행동하고 계십니까? 오히려 거꾸로 남이 내게 베푼 은덕은 쉽게 잊어버리고, 남에 대한 원망은 끝까지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아도 남에 대한 원망은 왜 이렇게 잘 기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유머가 생각납니다. 아파트 방송에서 이러한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지금 아나바다 장터가 들어섰으니 필요 없는 물건을 모두 가지고 나오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필요할 수 있는 물건들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허구한 날 부부싸움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자매님께서 남편을 끌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물건도 받나요? 제게 필요 없거든요.”

남편이 과연 필요 없는 물건일까요? 남편에 대한 원망이 커져서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만약 남편이 내게 베푼 사랑만을 기억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십자가 죽음을 당하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 시신이 없어졌다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에 베드로와 전통적으로 요한이라고 불리는 ‘다른 제자’가 무덤을 찾아갑니다. 이 다른 제자가 먼저 도착했지만 무덤에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를 기다립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현장에서 3번이나 부인하고 도망쳤습니다. 그에 반해 요한 사도는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성모님과 함께 끝까지 지켰지요.

교회의 반석으로 삼은 수석제자의 모습에서 원망을 하고 또 우습게 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워주셨기에 그에 대해 존중하는 모습으로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인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 역시 세속적인 판단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삶을 살라. 당신이 사는 삶을 사랑하라(밥 말리).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제자리로 돌아갔다(에픽테토스, ‘삶의 기술’ 중에서)

삶에서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우리는 잃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잃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라고 말하라. 그러면 마음의 평화가 시작될 것이다.

그대의 자식이 죽었는가? 아니다. 그는 본래의 위치로 돌아간 것이다. 그대의 배우자가 죽었는가? 아니다. 그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이다. 그대의 재산과 소유물을 빼앗겼는가? 아니다. 그것들 역시 본래의 위치로 돌아간 것이다.

아마도 그대는 나쁜 사람이 그대의 소유물을 빼앗아버렸다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때 그대에게 그것들을 주었던 이가 이제는 그것들을 거둬 다른 이에게 주었는데 화를 낼 이유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세상이 허락했기 때문에 그대는 현재 이러저러한 것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것들이 그대 곁에 있는 동안에 그것들을 소중히 여겨라. 여행자가 잠시 머무는 여인숙의 방을 소중히 여기듯이...

그리스 철학자인 에픽테토스의 글입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을 뿐이라는 생각으로 산다면 억울한 것도 많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지금 내 곁에 있는 동안만 소중히 여기면 그만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인천교구에는 제3대 교구장 착좌식이 있습니다. 기도 중에 기억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