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복음

2015년 9월 18일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수성구 2015. 9. 18. 06:33

 

2015년 9월 18일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제1독서 1티모 6,2ㄹ-12

사랑하는 그대여, 2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 3 누구든지 다른 교리를 가르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신심에 부합되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4 그는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논쟁과 설전에 병적인 열정을 쏟습니다.
이러한 것에서부터 시기와 분쟁과 중상과 못된 의심과 5 끊임없는 알력이 나와, 정신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에 번져 갑니다. 그들은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6 물론 자족할 줄 알면 신심은 큰 이득입니다.
7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8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9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10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11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그 대신에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12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복음 루카 8,1-3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얼마 전에 케이블 방송에 출연해서 여러 종파의 종교인들과 토크쇼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주제가 ‘남녀평등’에 관한 것이었지요. 사실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주제였기 때문에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사회자가 제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신부님, 왜 예수님께서는 12제자를 남자로만 뽑으셨습니까? 이것 남녀차별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남녀차별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파격적인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여성은 그리 존중받지를 못했었지요. 그래서 어떠한 이유를 붙여서 자신의 아내를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집안 정리를 못하거나, 음식을 못하는 것 등등의 이유를 내세워서도 얼마든지 쫓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남자 중심의 사회에서 남편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아니 어쩌면 불가능한 삶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뿐이 아니었습니다. 12제자 모두가 남자이기는 했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여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지요.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여인이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고 자신의 직분에 맞게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셨고, 또 함께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어떤 종교지도자가 이런 모습을 보였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주님을 따르고 있는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 안에 살고 있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많은 불평등이 존재하는 이 세상입니다. 경제, 교육, 건강, 정치적인 불평등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자신이 그 불평등을 체험하지 못하면 지금의 상황이 평등한지 불평등한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불평등을 느낀다는 것을 알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다른 사람이 누리는 것은 개인의 자질이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말하곤 하지요.

남녀간의 차별이 너무나도 엄청났던 시대에 파격적인 횡보를 보여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파격적인 모습으로 모두를 차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정도의 차별은 당연한 것이다’라는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똑같다는 생각으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주님의 관점을 마음속에 간직하면 어떨까요?

주님께서도 이런 모습을 원하시지 않을까요?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고 규정하는 어리석음이 아닌, 단지 다를 뿐임을 인정하고 포옹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살다 보면 흔히 저지르는 두 가지 실수가 있다. 첫째는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끝까지 하지 않는 것이다(신영복).


방송에 나오는 저를 찍어서 보내주셨네요. 에구 쑥스러워라.


핑계 대는데 있어서는 국가대표가 아닐까요?

어제 묵상을 하다가 ‘어렸을 때의 꿈이 무엇이었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참 되고 싶었던 것들이 많았습니다. 과학자도 되고 싶었고, 비행기를 모는 조종사도 되고 싶었습니다. 남들이 대통령이라고 말하기에 저도 쫓아서 대통령이라고 말했던 적도 있었네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사제’였던 것 같습니다. 집에 혼자서 어린이 미사 책을 꺼내들고 신부님께서 하시는 장면을 떠올리며 그대로 쫓아할 정도였지요. 특히 신부님 옆에서 복사를 서면서 ‘사제’는 저의 장래희망 영순위가 되었지요. 그리고 그런 저를 어머니께서도 크게 지지해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 진학을 하면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평생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특히 남들 앞에 항상 바른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역시 큰 부담으로 다가오더군요. 그래서 슬그머니 장래희망이 바뀌게 됩니다.

어떠한 계기를 통해서 다시 사제성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서 지금 이렇게 사제의 길을 가고 걷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잠시 갈등이 있었던 중학교 대의 제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만약 재미없을 것 같다는 핑계, 바르게 평생 살 자신이 없었던 핑계를 대고만 있었다면 분명히 저의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또 다른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지 않으려고 합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특히 주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굳은 믿음만 있다면 그러한 핑계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정하는 소망하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과거 학업 때문에, 취업 때문에, 생계 때문에 미뤄 두었던 일 등등, 이런저런 핑계로 애써 외면했던 일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정으로 소망하는 것을 언제 하겠습니까? 이제는 그런 핑계를 뒤로 하고서 진정으로 소망하는 것을 해야 할 때입니다. 더 이상 후회를 남기지 말아야지요.


감이 익어갑니다. 가을이 다가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