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복음

2015년 7월 28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수성구 2015. 7. 28. 06:22

 


제1독서 src

<주님께서는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33,7-11; 34,5ㄴ-9.28
그 무렵 7 모세는 천막을 챙겨 진영 밖으로 나가 진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것을 치곤 하였다. 모세는 그것을 만남의 천막이라 불렀다. 주님을 찾을 일이 생기면, 누구든지 진영 밖에 있는 만남의 천막으로 갔다.
8 모세가 천막으로 갈 때면, 온 백성은 일어나 저마다 자기 천막 어귀에 서서, 모세가 천막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 뒤를 지켜보았다.
9 모세가 천막으로 들어가면, 구름 기둥이 내려와 천막 어귀에 머무르고, 주님께서 모세와 말씀을 나누셨다. 10 구름 기둥이 천막 어귀에 머무르는 것을 보면, 온 백성은 일어나 저마다 자기 천막 어귀에서 경배하였다.
11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 모세가 진영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의 젊은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천막 안을 떠나지 않았다.
34,5 주님께서 모세와 함께 서시어,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셨다. 6 주님께서는 모세 앞을 지나가며 선포하셨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7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
8 모세는 얼른 땅에 무릎을 꿇어 경배하며 9 아뢰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28 모세는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밤낮으로 사십 일을 지내면서, 빵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 그는 계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판에 기록하였다.

 

 복음 src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36-43
그때에 36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오늘의 묵상

탈출기 32―34장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해당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탈출기 19―24장에서 이스라엘은 시나이에 머물면서 하느님과 계약 관계를 맺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 곧 하느님께 속하여 그분의 소유가 되고 그분을 섬기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32장에서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섬깁니다. 이 광경을 보고 모세는 계약의 돌 판을 깨뜨립니다.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계약서를 찢고 계약을 파기하여 계약 관계가 끝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떨어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 상태로 그냥 머물 수는 없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가 끌어안았듯이, 하느님 편에서 이스라엘과 맺었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왜 그 길밖에 없을까요? 이스라엘이 착하고 열심이라서가 아닙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시라는 점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야훼(주님)’라는 이름에 뒤이어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신 당신의 이 두 번째 이름은, 우리에게 좌절과 절망은 없다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자녀가 아무리 잘못해도 부모는 자식과 맺은 관계를 끊어 버리지 않습니다. 내가 낳은 자식이라는 현실이 바뀔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을 때 그분께서 우리의 손을 놓아 버리신다면,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그 순간에 이미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을 가여워하듯,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이들을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십니다(화답송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