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복음

2015년 6월 25일 연중제12주간 목요일

수성구 2015. 6. 25. 07:56

 

복음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21-2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28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29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오늘의 묵상
독서에서 자식을 낳지 못하는 사라이는 자기 여종인 하가르를 통하여 남편 아브람에게 아이를 낳아 주려고 합니다. 사라이의 태도는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내용과 흡사합니다. 그 법전에 따르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인은 몸종을 남편의 소실로 줄 수 있었고 그 아이는 본부인의 친자식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지략을 통하여 사라이는 자신의 불운한 처지와 난관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하였지만, 하느님의 계획은 사라이의 계산과는 다른 방법으로 전개됩니다. 곧 사라이는 하가르가 낳은 자식으로 자신의 지위가 올라갈 것이라 기대하였으나, 하가르에게서 괴로움을 겪게 되고 이를 아브람에게 호소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길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의 절정은 불의를 당하던 사라이보다는 그것 때문에 구박받는 하가르에게 하느님께서 오히려 호의를 베푸신다는 점입니다. 하가르는 주님의 천사를 만납니다. 천사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메시지를 전해 주는 존재로서, 천사와 만나는 것은 곧 구원의 체험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천사와 만남은 일정한 장소나 시간에 매여 있지 않으며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것이지요.
천사가 하가르에게 낳게 될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로 부르라고 지시한 것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하가르가 고통 중에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본문에는 하가르가 부르짖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그 자체가 소리가 되고, 하느님은 바로 그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사라이와 하가르의 상황은 묘하게 대조됩니다. 곧 사라이는 자기 힘을 믿고 괴로울 때 ‘내가 겪는 불의에 책임을 지라.’고 아브람에게 호소합니다. 반면 하가르는 하느님께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지도 않았으나, 그 소리가 하느님께 들려 하느님께서 그 호소에 응답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온갖 불의와 갈등, 고통의 진정한 해결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점을 독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음 말씀도 놀랍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 것이 아닌 셈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을 빌려 자기 마음대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하느님의 뜻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