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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13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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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이사 61,9-11
내 백성의 9 후손은 민족들 사이에, 그들의 자손은 겨레들 가운데에 널리 알려져, 그들을 보는 자들은 모두 그들이 주님께 복 받은 종족임을 알게 되리라. 10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11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
복음 루카 2,41-51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요즘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대체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분명히 우리나라말인데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현대 철학의 거물인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책 ‘철학적 탐구’에서 이런 말을 던졌습니다.
“사자가 말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주어진 환경과 개인의 경험이 다르다면 같은 말을 한다 해도 서로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를 보면서 학생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휴대전화를 이용해서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는 학생들은 아무래도 제대로 된 문장보다는 짧은 은어들을 많이 사용합니다. 또한 책을 보기보다는 미디어를 통해서 정보를 얻는 학생들이다보니 삶의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말을 사용하고 있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삶의 방식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서로간의 대화를 위해서 삶의 방식이 공유되고 일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똑같이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주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과 삶의 방식이 공유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내 방식만을 무조건 내세우고 따르라고 한다면 어떻게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일상 삶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을 지내는 오늘, 성모님의 모습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항상 주님 삶의 방식에 일치하려고 노력하셨고 또 그렇게 철저히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듣는 그 순간에도,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낳는 그 순간에도, 또한 천사의 명령에 따라 이집트로 피신할 때에도, 오늘 복음에 등장하듯이 예수님을 성전에서 다시 찾은 뒤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모습에서도,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랑하는 외아들을 보면서도 하느님의 뜻과 그 방식에 일치하셨습니다. 도저히 인간적인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그 순간에도 철저히 하느님께 맞추신 성모님이시기에 우리들의 어머니, 그리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주님 삶의 방식에 일치되어 살고 있을까요? 일치된 삶을 통해서만이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말했듯이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은 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주님 삶의 방식에 맞추어 나갈 때 또 다른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백 마디보다 말없이 새벽에 일어나 손자가 자는 방에 군불을 지피는 것이 사랑의 원형이 아닐까. 사랑은 그리 호들갑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랑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은근한 희생을 수반한다(정호승).
우리들의 어머니, 성모님~~~
하느님의 자리를 많이 만듭시다.
‘월든’의 저자인 미국 사상가 겸 문학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농장이나 가옥, 헛간, 가축, 농기구 등을 부모로부터 상속받았기 때문에 도리어 불행해진 이 마을의 젊은이들을 알고 있다. 이러한 물건들은 상속받기는 쉽지만 버리기는 어렵다. 차라리 그들이 넓은 목초지에서 태어나 늑대의 손에서 자라났다면, 자신이 땀 흘려 경작해야 할 밭이 어떤 곳인지 뿌옇게 서리 끼지 않은 눈으로 꿰뚫어볼 수가 있었으리라.”
저는 여행을 많이 갑니다. 그런데 세상의 일에 많이 얽매여 있으면 집을 떠나기가 쉽지 않더군요. 걱정도 되고 불안감도 커져서 도저히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얽매여 있는 것이 없으면 아주 쉽게 떠납니다. 가방에 몇 개의 짐만 집어넣고 훌쩍 떠나도 아무런 부담이 없지요.
버리기 어려운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느님의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음을 종종 깨닫게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위의 소로의 말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의 것은 조금 소유하면서 하느님의 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참 쉽지 않지요?
헨리 데이비드 소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