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연중 제9주간 수요일 -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것은

수성구 2015. 6. 3. 04:05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9주간 수요일

 

 

 

마르코 12장 18-27절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것은

 

 

 

우리 형제들이 애지중지하는 귀염둥이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데, 이름이 ‘삼식이’입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고 있어 다들 걱정이 태산입니다.

 

무엇을 주던 게눈 감추듯이 후다닥 먹어치우던 녀석이었는데,

초스피드로 자기 몫을 다 먹어버리고, 엄마 몫까지 빼앗아 먹던 녀석이었는데,

벌써 사흘째 저리 식음을 전폐하고 있으니, 형제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뭘 가져다줘도 시큰둥한 표정으로 관심이 없습니다.

집안에 들어가 나오지도 않습니다.

가까운 동물병원에 가서 여러 가지 검사를 했지만 특별한 병명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큰 병원으로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려고 했습니다.

 

어젯밤 자러갈 때는 은근히 걱정되더군요.

저렇게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내일까지는 살아있어야 하는데...그래야 큰 병원이라도 가볼 텐데...

 

드디어 아침이 밝았습니다.

묵상이 끝나자마자 삼식이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삼식아! 불렀습니다.

집안에 드러누워 있었지만 살며시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힘이 별로 없었지만 꼬리도 흔들었습니다. 얼마나 고맙던지요.

 

이 아침 우리가 자리를 털고 다시 깨어났다는 것,

이 순간 아직 우리가 숨 쉬고 있다는 것, 그것은 보통 큰 축복이 아닙니다.

 

숨결이 끊어진 생명체를 보셨습니까?

목숨을 다한 동물을 보셨습니까?

뻣뻣합니다. 끔찍합니다. 참혹합니다. 악취가 새어나옵니다.

거기에 더 이상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사랑도 없습니다.

희망도 없습니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가능성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롭게 아침을 맞이했다는 것은 새 출발의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산 이들을 위한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이 아침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리라 확신합니다.

“새 생명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노라.

어제를 잊고 새롭게 살아가거라.

죄로 얼룩진 과거는 내게 모두 맡기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거라.”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그 어떤 모습이든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사랑받기 충분하단다.

살아있는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은 내 기쁨이고 내 희망이며 내 행복이란다.”

 

숨 쉬고 있다고, 목숨 붙어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살아있기 위해서는 참으로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산다는 것은 죽어야 가능합니다.

매일 매 순간 죽어야 가능합니다.

 

알량한 내 자존심에 죽고,

평생 따라다니던 죄책감에 죽고,

어두웠던 지난 방황의 날들에 죽고,

오랜 상처에 죽고...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