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사는 이야기

중년

수성구 2014. 10. 18.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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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 손진은 


열쇠를 돌리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문득 등을 끄지 않은 채 차에서 내린 간밤의 기억이

몰려온다 낭패, 눈꺼풀도 내리지 않고

정신없이 꿈속을 헤매는 사이 핏기를 잃어버린 내 눈알

어떤 것에 뒤집혀 긴 밤 긴 생을

후들거리는 다리와 텅 비어가는 머리도 모른 채

내 헤드라이트는 발광했을 것이다

무언가에 홀려 뚫어지게 바라보는 동안

계절은 가고 주름살은 깊어졌고 흰 머리는

늘어났다 어디로 가는가 철철 넘치던 팔뚝의 푸른 힘줄은

전류처럼 터져 나오던 생기, 머릿속을 흐르던 생각은

어느 허공으로 날아가버리고

까칠하고 초췌해진 몸뚱이로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는가

어저께까지도 명품이라고 믿었는데

눈 한번 들었다 내려놓는 사이

어떤 것에 취해 이렇게 떠밀려온

두드려도 가없는 무슨 소리만 내보내고 있는

중년을 일으키려 저기, 정비기사가 달려온다

또 하나의 몸이 부끄러운 듯 마중하러 간다

 

- 시집『고요 이야기』(문학의 전당,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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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차 키를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허둥대고 백화점 주차장에 차 세워둔 곳을 잊어버리고서 헤매는 경우는 건망증에 해당하지만 막상 운전석에서 자동차 키를 어떻게 해야 시동이 걸리는지 까맣게 잊는 경우는 명백한 치매 증상이라 하겠다. 좀 자극적인 사례로 남자가 화장실에 서서 볼일을 볼 때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이 물건을 소변용도로 말고 달리 사용했던 게 언제였지?’ 생각나지 않으면 그저 기억력의 쇠퇴라 간주되겠으나, ‘이게 무엇에 쓰는 물건이지?’ 했다면 불행히도 심한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얘기다.

 

 이 시는 건망증이나 기억력 감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육체적 쇠잔을 자각할 때 필연적으로 따르는 심리적 변화를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무언가에 홀려 뚫어지게 바라보는 동안’ 방전된 세월에 관한 자기 고백이며 성찰이다. 단테의 신곡 첫머리엔 이런 고백으로 시작된다. ‘내 인생 여정의 한복판, 그 캄캄한 숲 속에서 감각을 되찾았을 때 난 바른 길을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단테의 나이는 35세였다. 그 시대엔 그 나이가 중년이었고 삶의 정돈을 생각할 시기였다.

 

 과거엔 마흔 안팎의 나이를 중년이라 했으나 수명연장과 환경의 변화로 지금은 50대까지를 포함해 중장년이라고 일컫는다. 일생에서 가장 활동이 왕성하고 성공과 실패를 민감하게 경험하는 시기이며, 따라서 온갖 인생의 영욕과 더불어 때로는 두렵고 잔혹한 세월이기도 한 것이 중년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나이 40에 누렸던 대학교수와 방송진행 그리고 인기작가라는 안락한 일상을 처분하고 시칠리아로 떠나기 전 그 시절을 '실로 숨 막히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뒤통수 어딘가에 플라스틱 빨대가 꽂힌 기분'이란 표현까지 썼다. 아파트와 차, 안정된 생활에 안주했던 그는 자신이 '그토록 한심해 하던 중년의 사내' 모습이었다고 얼굴을 찡그렸다.

 

 패기만만했으나 지금은 순식간에 퍼져있는 저 중형차처럼 내 몸 또한 그러하지 않는가. 스스로 그럴듯하기보다는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한 생은 아니었던가. 어쨌거나 일단 몸부터 일으키고 봐야겠다. 세월 앞에 무기력해진 명품도, 방전된 나도 정비를 좀 받아야겠다. 기름칠을 하고 나사도 조여야 쓰겠다. 한때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물음에 ‘그랜저’로 대답했다는 돼먹지 않은 신차 광고처럼 삐까뻔쩍한 처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아직 보여줄 게 남아있어야겠다.

 

 

- 시인 : 권순진 (안드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