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 전하라

수성구 2022. 9. 27. 04:46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 전하라

 

욥 3,1-23; 루카 9,51-56 /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2022.9.27.

 

  17세기 프랑스에서 활약한 빈첸시오 사제는 가난한 소농 출신이면서도 이름에서는 귀족의 이름처럼 ‘빈첸시오 아 바오로’로, 그러니까 바오로 가문의 후손 빈첸시오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히브리족의 명문 가문 출신이었던 바오로가 자신을 비주류로 냉대하던 기성 사도단을 피해 이방인의 사도로 자처하면서, 이방인들 중에서도 보잘것없는 가난한 이방인들을 주로 찾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한 것과 비슷합니다. 빈첸시오도 프랑스 안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처럼 사도직을 행할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를 양성하여 가톨릭교회 안에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 활동이 이어지게 했습니다. 

 

  바오로 선교의 정통 노선을 계승한 빈첸시오의 이러한 활약이 오늘날에 와서 더 돋보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메시아로서 오신 예수님께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신 일인데, 완고한 유다교의 분위기 탓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역사에서 너무도 쉽게 잊혀져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메시아로서 당신의 사명을 천명하시며 공생활을 시작하셨고(루카 4,18-19), 공생활 동안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때에도 가난한 이들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며 그래서 행복하리라고 장담하셨습니다(루카 6,20-21). 과연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각종 질병을 앓는 이들이나 장애로 고생하는 이들, 마귀들린 이들, 슬퍼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로 예수님께로 와서 삶의 희망을 얻었습니다. 당신의 손이 모자랄 때에는 제자들을 전국으로 파견해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 그때 철저하게 비무장과 빈 손으로 가야 하고 파견지에서도 가난한 생활양식을 지킴으로써 가난한 이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말라고 당부하시며,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고 명하셨는데, 이 명령이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가난한 이들이 철부지 어린아이들처럼 순수하게 복음을 받아들여 하느님께로 돌아왔다는 귀환보고를 들으시고는 모처럼 기뻐하시기도 하셨습니다(루카 10,21). 공생활 동안에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예수님께 십자가이면서도 동시에 부활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들으셨듯이 사마리아 사람들도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다는 소문을 들었을텐데도 유다인들로부터 억울하게 차별받은 데 대한 상처가 깊어서인지 사마리아 사람들의 완고한 민심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고 결국 그분을 배척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저 그들이 사는 마을을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가셨을 뿐, 그들이 가하는 냉대에 대해 모르는 척하셨습니다. 이것이 쉽지 않은 태도라는 것은, 억울하게 사탄으로부터 재앙의 시험을 받는 욥도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를 원망하는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의인을 대표하는 욥의 이러한 태도는 일생 동안 억울한 일을 다반사로 당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태도로서는 모자랍니다. 

 

  사실은 초대교회 시절에 성령을 받은 사도들과 신자들이 공동생활 양식을 이룩하고는 가난한 이들이 하나도 없게 만들 정도로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이 최초의 교회 전통이 되게 했습니다. 가난한 이들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 4백 년 동안 이단들과의 사상 논쟁을 거쳐서 신앙의 정식을 확정하던 고대 교회 시절에도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 명제는 사도신경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창조 신앙, 예수의 신성과 인성, 삼위일체 그리고 교회의 형식상 조건 정도만 교리 정식만 들어갔을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간혹 간헐적으로 출현하는 성인 성녀들의 삶을 제외하고는 서구 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통을 까맣게 잊어버려오던 터에 빈첸시오가 이를 상기시켜준 것입니다. 이는 마치 천동설이 아니라 지동설이 과학적 진리임이 뒤늦게 밝혀진 것처럼, 역시 뒤늦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교들도 이렇게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의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사목헌장, 1항)

 

  천동설이 아니라 지동설이 과학적 진리이듯이, 오늘날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라는 선교 과업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세상의 통념을 변화시켜줍니다. 즉 그들은 불쌍해서 우리가 도와주어야 하는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을 복음화시킴으로 인해서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메시아의 교회로 쇄신될 수 있고, 가난한 이들을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사회 공동선을 증진시킴으로 해서 비로소 사회가 문명화된다는 점에서 가난한 이들은 선교의 주역입니다. 이것이 영적 지동설이자 선교의 정통 노선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십자가야말로 우리를 그들 안에서 부활할 수 있게 해 주는 성령의 표지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회사목이 처한 어려운 현실이요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갖는 긍지입니다. 교회는 이 십자가로써 부활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