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수성구 2022. 9. 23. 05:13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코헬 3,1-11; 루카 9,18-22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2022.9.2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도로 양성하는 디다케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진도를 나가셨습니다. 그것은 신앙을 고백받은 일입니다. 제자가 스승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면 배운 바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토로하면 될 일이지만 사도가 그리스도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면 그런 지적인 차원에서의 교감만 가지고는 모자라고 영적인 차원에서 교감하는 통공이 필요합니다. 서로의 인격과 존재를 걸고 영혼의 언어로 표현해야 비로소 가능한 경지입니다. 

 

  예수님으로서는 이를 위해서 모처럼 갈릴래아 지방을 떠나 호수로부터 60km 정도 떨어진 필리피 카이사리아로 도보 피정을 가셨습니다. 왕복하자면 족히 사흘은 걸릴 이곳을 호젓하게 다녀오셨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군중으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스승과 제자들만의 오붓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고 봐야지요. 말하자면 군중에게 봉사해야 할 케리그마의 때가 있고, 제자에게 집중해야 할 디다케의 때도 있는 것입니다. 

 

  작정하고 나선 그 길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의 생각을 떠보셨습니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헤르몬 산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별 생각도 없이 걷던 제자들이 느닷없이 스승이 던진 이 질문에 생각나는 대로 대답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닮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엘리야가 다시 살아난 것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디다.” 그 대답을 듣자마자 예수님께서 본론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첫 질문과 달리 뜬금없이 던져진듯한 그러나 사실은 정곡을 찔린 이 두 번째 본 질문에는 아무도 선뜻 나서서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전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나, 군중의 반응과 비슷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물쭈물하는 제자들 사이에서 그래도 제일 연장자인 베드로가 총대를 메고 나섰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상황이었습니다. 달걀이 부화되는 과정에서 병아리가 다 자라서 껍질을 깨고 나올 때가 되면, 병아리가 안에서 그 여린 부리로 나름 세게 껍질을 쪼아야 하고(啐), 이 작은 소리를 듣고 눈치 챈 어미닭이 그 부위를 정확하게 단 한 번에 세게 쪼아주어야 합니다(啄). 이 줄(啐)과 탁(啄)이 같은 시각(同時)에 이루어져야 병아리가 살아서 나올 수 있습니다. 어미닭은 달걀 속 병아리가 쪼는 소리를 듣고 본능적으로 그때를 압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이 결정적인 모범답변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반가워하는 기색도 감추시고 엄중한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당신 운명을 예고하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야말로 디다케 과정의 핵심이었는데, 이 핵심 이치를 깨닫지 못한 신앙고백만으로는 사도로서 인정하기에 아직 이르고 때가 되지 않았다고 보신 겁니다.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굳이 갈릴래아 호수로 찾아오셔서 그예 베드로로부터 세 번에 걸친 문답을 통해 재차 신앙 고백을 받아내시지요? 그때가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도로 인정하시고 신자들을 돌보아야 할 사목적 임무와 복음 진리를 선포해야 할 선교적 사명을 부여하신 때입니다. 사도가 되자면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이 깨달음을 자신의 삶과 행동으로 증거해야 하며 이를 말로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코헬렛이 쓰여지던 기원전 3세기경 헬레니즘 지배 하의 이스라엘 상황이나, 임금이나 백성 중 누구 한 사람에게도 칼끝을 겨누지 않았던 천주교 신자들을 대역죄인처럼 몰아서 죽이던 19세기 조선의 상황이나, 시절이 하수상할 때에는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죄스런 세속에 물들지 않고 깨끗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치명하는 선택이 최상의 선택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교우들이 매일 바치던 일상의 기도 언어는 언제라도 죽기를 각오한 사생결단의 언어였습니다. 배교를 강요하며 모진 매질을 가하던 관장에게, “나는 천주교인이오! 차라리 죽이시오!” 하는 고백의 언어로써 천금보다 귀하고 태산보다 무거운 심판의 언어를 발하여 스스로 천국행을 결정짓던 때였습니다. 그리하여 백년의 박해기간 동안 한국교회에는 관변기록상으로 2천여 명, 신자들의 구전상으로 2만여 명이 이렇게 해서 치명하여 순교자가 되었고, 그들 덕분에 이제 막 탄생한 신생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의 교회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어서 꼴찌에서 첫째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치명의 때였습니다. 

 

  하지만 박해가 종식된 지도 백년이 넘어가는 지금에는 다릅니다. 지금은 믿는다고 잡혀가서 박해받는 시대가 아니며, 죽음을 각오하고 기도생활을 해야 하던 암울한 때도 아닙니다.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순교자들이 숨지기 전에 바친 마지막 기도는 “이 겨레를 주의 백성이 되게 해 주소서!”였으며, 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교우촌 신자들이 핍박을 받으며 기도하던 지향은 오로지 단 하나였는데 그것은 “이 땅에 거룩한 주의 나라를 펴주소서!” 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은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증거해야 할 때이며 고백해야 할 때입니다. 모든 일에 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