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다양성 안의 일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수성구 2022. 9. 13. 04:10

다양성 안의 일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1코린 12,12-31; 루카 7,11-17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2022.9.13.;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로 가셨을 때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 상여 행렬과 마주치셨습니다. 사정을 알아보니 과부의 외아들이 죽은 것이었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은 그 아들을 살려주시어 그 어머니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무릇 소생 기적은 죽었던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오직 하느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도 육신이 다시 살아나도 수명이 다하면 언젠가 죽게 되는 운명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부활은 수명과 상관없이 영원히 사는 일로서, 소생 기적도 신적 권능으로라야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이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사하시는 부활 신앙 역시 신적 권능으로만 가능한 일로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부활시키심으로써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소생이 육신을 살리는 일이라면 부활은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소생 기적은 부활 신앙을 위해 일으키신 성사적 비유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교우들에게 교회에 대해 설명하면서 매우 탁월한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비유인데,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으로 일치되어 있는 것처럼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사정이 매우 다양하지만 모두 한 몸처럼 정교하게 일치시킬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다양한 지체들이 정교하게 일치될 수 있으려면 반드시 머리는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이런 일치의 소명으로써 교회는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일치도 중재할 수 있는 성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교회헌장, 1항)입니다.

 

  세상에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으며 차이가 나는 것들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는 현실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 다양한 차이를 기반으로 해서 일치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삼으라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가정을 이루는 부부 역시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지지만 남녀는 서로 많이 다릅니다. 신체적 특성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다르고 사회적 역할도 다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서로 다른 남녀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 차이를 기반으로 삼아서 일치하라고 섭리하셨습니다. 다양한 차이를 정교한 일치로 이루는 힘은 사랑인데, 이 섭리의 비밀은 일치를 이룬 다양성에서 나오는 풍요로운 가능성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사도 바오로가 가르치는 뜻은, 그분이 공생활을 통해서나 부활하신 후 성령의 이끄심을 통해서 다양한 차이를 일치시킬 수 있는 사랑의 힘을 보여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부르신 열두 제자만 해도 매우 다양한 출신 성분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어에 능숙한 지식인 출신 이스카리옷 유다가 있었는가 하면,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던 무식한 어부 출신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학력의 차이가 인간관계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만만치 않은 갈등 요인이 될 수 있는 차이점이었습니다. 정치적 성향도 달랐습니다. 로마제국에 빌붙어 세리 직업으로 치부하던 극우 성향의 마태오가 있었는가 하면, 혁명당원 출신으로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로마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해 보려던 극좌 성향의 시몬과 토마스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성향의 차이가 가져오는 사회적 갈등을 생각해보면 이 역시 심상치 않은 갈등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을 이룩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스승으로서 예수님께서는 그 다양한 제자들에게 각기 다르게 양성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비슷한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도 수제자로 삼으신 우직한 베드로에게는 “사탄아, 물러가라!”(마태 16,23) 하고 호되게 야단을 치신 스승께서 애제자로 아끼신 다혈질 성향의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마태 20,22)고 조용히 타이르셨습니다. 또 베드로나 유다가 둘 다 배신을 앞두고 있었는데, 매사에 당신을 앞서 나가려던 유다가 당신을 팔아넘기고 나서 시치미를 뚝 떼고 최후의 만찬에 참석하자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7)하고 말리지 않으셨지만, 베드로에게는 “네가 다시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2)하고 붙잡으셨고 과연 부활 후에 따로 찾아가 독대하시며 배신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모두를 위해서는 십자가를 짊어지심으로써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 모두 일생이나 목숨을 바쳐 선교하는 사도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렇듯 다양성 안의 일치를 사랑으로 이룩하신 예수님의 희생이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을 살아있게 만들었고, 지금도 만들고 있으며, 앞으로도 만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당신의 나라로 바꾸시는 복음화는 다양성 안의 일치를 이룬 교회를 통해서 갈등과 분열로 상처 입은 세상을 살리는 부활의 사회적 효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