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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0일 톨렌티노의 성 니콜라오

수성구 2022. 9. 10. 05:11

9월 10일 톨렌티노의 성 니콜라오

축일: 9월 10일

톨렌티노의 성 니콜라오

San Nicola da Tolentino Sacerdote

ST.NICHOLAS of Tolentino

St.Nicholas of Tolentine

1245 at Sant’Angelo, March of Ancona, diocese of Fermo

-10 September 1305 at Tolentino,

선원,고해자, 거룩한 영혼들,불쌍한 영혼들의 주보성인

성아우구스티노수도회.

 

 

 

성 니콜라오는 젊어서 성 아우구스띠노회에 입회하여,

1275년부터 죽을 때까지 고향인 마르까에서 그리 멀지 않는 톨렌티노에서만 살았다.

그는 주로 지칠줄 모르고 사목활동만 했는데,

매우 뛰어난 설교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적까지 행한 것으로 전해온다.

이 성인은 기적을 3백번 이상 하셨고, 돌아가신 뒤에도 정기적으로 매년(액체) 피를 흘리셨다고 한다.

 

그는 임종할 때 다음과 같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형제들에게 남겼다:

"나는 양심에 조금도 거리끼는 일이 없읍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톨렌티노의 성 니콜라오는 성인으로 시성(諡聖)된 최초의 아우구스띠니안 수도자이다.

 

그는 고행자, 기도의 사람, 영혼의 지치지 않는 목자로서 알려졌다.

그의 죽음 이후 오래지 않아, 그의 삶에 대한 기억들은 대중적인 신심으로 발전 하였다.

1446년 시성되었다.

 

 

톨렌티노시는 이탈리아의 항구인데, 니콜라오가 톨렌티노의 성인이라 불리게 된 것은

그가 톨렌티노 시의 출신은 아니지만 장년부터 생을 마칠때까지 그 도시에서 살면서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활동했고,또 그의 성덕으로 시민의 거울이 되어

사후에 톨렌티노시의 주보 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게 된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요,

 

둘째로는 미라 시의 출신인 동명의 성인과 구별하기 위함이다.

 

 

 

그의 양친은 매우 열심한 신자였으나 오랫동안 자녀가 없는것을 한탄하며

미라의 성 니콜라오의 전구를 청하면서 하느님께 자녀 하나를 낳게 해 주실것을 애원하며

파리에 있는 성인의 무덤을 참배하고 왔더니

과연 얼마 후에 옥동자를 낳게 되어 성인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아이의 이름을 니콜라오라고 했다.

 

 

니콜라오의 출생지는 성 안젤로라는 시골이었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즐겼으며 공부할 생각으로 톨렌티노 시에 있는

성 살바도르 성당 비서 신부를 만나 그 뜻을 전했을 때 그 신부도

소년의 재주가 뛰어남을 알고 장래 사제로 양성하기 위해 쾌히 장학금을 알선해 주었다.

 

1265년 열아홉 번째 봄을 맞이한 어느 날,

성 아우구스티노 관상 수도회의 사제 한 분이

’이 세상의 허무함과 하느님께 봉사하는 자의 행복’이란 제목으로 강론하는 것을 듣고

이에 대단히 감동하여,그렇지 않아도 세속과 교제하기를 싫어했던 그는

수도자가 되기를 결심하고 즉시 그 수도회의 입회를 청했다.

이에 수도원장도 청년의 좋은 뜻과 재주의 비상함을 기뻐하며 곧 승락했다.

 

성 아우구스티노 관상 수도회의 일원이 된 그는

그 회의 준엄한 규율을 충실히 지키며 동료들이 감탄할 정도로 어려운 고신 극기의 생활을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부모, 친족들은 그의 몸을 생각하여

좀더 쉬운 수도회에 들어가도록 권고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고행을 책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편안한 생활을 찾아서 이 수도원에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니콜라오는 성품 성사를 받아 사제가 되었고

그의 특별한 임무는 순회강론(巡廻講論)과 고해 성사를 주는 것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는 극히 엄격했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극히 부드러웠으며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은 온정으로 죄인을 회개시키기에 노력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성사를 보기 위해 사방에서 모여든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 신자들의 감탄을 사게 된 것은

죄인들의 보속을 자신이 도맡아 극기 생활로 대신해 주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심한 고행과 활동은 그에게 피로를 가져왔다.

니콜라오는 마침내 병석에 눕고 예수 수난의 성화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때는 1306년 9월 10일이었으며, 나이는 60세였다.

 

임종하면서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도 바오로(Paulus)의 말씀을 남겼다.


"나는 양심에 조금도 거리끼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는 1446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391년 사제로 서품된 아우구스티노는 히포에 있는 정원을 구입하여 수도자 공동체를 건설할 수도원을 짓게 되었다.

후일에 그가 그의 수도 형제들을 위한 규칙서에서 언급하였듯이 이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크리스찬 공동체에서 영감을 받아서 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조화 속에서 함께 살며 한마음과 한뜻을 추구하여라." (고백록 1권 2장)

 

그가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오로지 그의 성직자 형제들과 공동체 생활을 계속하기 위하여, 그의 관사에 거주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나중에 도시 안에 여성들의 수도원이 건립되었을 때,

아우구스띠니안의 수도적 삶의 형태는, 남자 평신도, 여자 평신도, 그리고 수도자와 성직자, 이렇게 세 가지로 제시될 수 있었다.

이러한 아우구스띠노의 이상(理想)은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종교개혁 시대

삭소니(Saxony)의 아우구스띠노 엄수 수도회(Observantine Congregation)의 회원이었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1505년 에르푸르트(Erfurt)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하여

1507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아우구스띠노회 회원이었다.

 

그는 1510~11년 겨울, 계속되는 수도회의 자치권에 대한 논쟁으로 수도회 대표로 로마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가 성 아우구스띠노와 리미니의 그레고리(Gregory of Rimini)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오직 성서(sola Scriptura), 오직 은총(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s)으로" 라는

그의 교리를 처음 주장한 것은 성서학 교수로 있던 비텐베르그(Wittenberg)에서 였다.

 

1517년 10월 31일, 대사(Indulgence)에 관한 95개의 반박 논제를 발표하였고,

이후 가톨릭을 떠났다.

이것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결국에는 종교개혁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이후의 역사는 아우구스띠니안들의 삶에 엄청난 단절을 가져왔다.

다른 수도회와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이 수도생활을 떠났으며,

수도회의 재산은 프로테스탄트 혁명을 받아들인 도시들로부터 몰수당했다.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역사 참조 www.osakorea.or.kr

 

루터는 1517년, 비텐베르크에서 교회의 문에 자기 논문들을 붙였다.

그로부터 17년 후에 성 이냐시오는 가톨릭 종교 개혁을 위한 너무도 훌륭한 역할을 수행할 수도회

"예수회Society of Jesus"를 설립했으며 그의 제자들은 교회 개혁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예수회  www.sogang.ac.kr/~gesu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