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9월 9일 성 베드로 클라베르 사제

수성구 2022. 9. 9. 05:50

9월 9일 성 베드로 클라베르 사제

축일:9월 9일

성 베드로 클라베르 사제

St.Peter Claver

San Pietro Claver Sacerdote

(Barcellona (Spagna), 25 giugno 1580 - Cartagena (Colombia), 8 settembre 1654)
Born :1581 at Verdu, Catalonia, Spain
Died : 8 September 1654 at Cartegena, Colombia of natural causes.
Canonized :1888 by Pope Leo XIII
Pietro = pietra, sasso squadrato, dal latino

Slave of the Blacks; Slave of the Slaves

흑인 포교 사업의 수호 성인,  예수회

 

 

Pedro Claver (Spain, 1580)

Colombia, 1619-1654

 

1580년 스페인의 베르두에서 태어난 성인은

20세 되던 해에 예수회에 입회하여 35세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노예들의 집단 수용소에서 활동하게 된 그는 음식물과 의약품을 공급하고,

그들에게 신앙을 가르쳐 30만명을 개종시켰고,

나환자들과 죄수들을 위해서도 아낌없이 헌신하여 흑인 선교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스페인 태생인 젊은 예수회 회원 베드로 클라베르

신세계 식민지 선교사가 되기 위해 1610년 조국을 영원히 떠났다.

그는 카리브 해를 거쳐 부유한 항구 도시 카르타헤나(지금의 콜롬비아)로 향했다.

그는 거기서 1615년에 서품을 받았다.

그때까지 근 100년 동안이나 노예 무역이 아메리카에서 성행되었고 카르타헤나는 노예 무역의 중심지였다.

운송중에 약 1/3 이 죽어 가는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상황에서 1만 명의 노예들이

서아프리카로부터 대서양을 횡단하여 매년 카르타헤나 항구에 쏟아졌다.

비록 노예 무역 행위가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비난을 받았고,

후에는 비오 9세에 의해 ’최고의 악행’이라고 명명되긴 하였지만 그것은 나날이 번창되어 갔다.

 

클라베르의 선구자인 예수회 신부 알퐁소는 클라베르가 스스로 ’영원한 흑인들의 노예’임을 공언하고

그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려고 카르타헤나에 도착하기 전 40여 년 동안 이미 노예들을 위해 봉사해 왔다.

노예선이 항구에 들어오자마자 클라베르는 노예들이 사슬에 묶인 채 짐승처럼 배에서 떼지어 나와

가까운 광장에 세워진 후에야 의약품,음식,빵,브렌디,레몬,담배 등을 가지고 그들 사이에 설 수 있었다.

통역자의 도움으로 그는 몇 가지 지시를 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과 하느님의 가호를 확실히 말해 주었다.

 

40년간 선교 활동을 하는 동안 클라베르는 약 30만 명의 노예를 가르치고 영세시켰다.

그의 사도직은 노예들은 돌보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참으로 카르타헤나의 사도이며 도덕적으로 명망 높은 인물이 되었다.

그는 시 광장에서 연설도 했으며, 시골에서 선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군인과 무역상들에게도 포교했고,

노예 소유주와 대농장 주인들의 감시와 방해를 피하느라고 노예 숙소에서 숙박했다.

그는 4년 동안 병으로 거의 활동을 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제대로 간호를 받지 못한 까닭에 결국 1654년 9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흑인 부랑자들에 대한 그의 열성을 불쾌하게 생각하던 시장도 그가 죽자

공금으로 그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도록 지시했다.

그는 1888년에 시성되었으며 교황 레오 13세는

1896년 그를 전세계 흑인 포교 사업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다.

 

성령의 굳셈이 클라베르의 대담한 행동과 중요한 결정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결코 돌아오지 못할 조국을 떠나려는 결정은 현대인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엄청난 의지적 행위를 보여 준다.

모든 이들 중 가장 비천하고,거절당하고 버림받는 삶들에게

영원히 봉사하려는 베드로의 결심은 아주 영웅적이다.

우리가 그 같은 사람의 삶에 비추어 자기 삶을 평가할 때 성령의 놀라운 힘에

더욱더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잠재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된다.

 

베드로 클라베르는 그의 흑인 형제 자매들에게 브랜디,음식,약품 등을 나누어 주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봉사가  언어로 하는 설교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는 가끔 "우리는 입으로 그들에게 말하기 전에 우리 손으로 그들에게 말해야 한다."고 했다.

 

"We must speak to them with our hands by giving,

before we try to speak to them with our lips."

 

 

 

옛날에는 노예라는 것이 있어 사람이면서도 물건 취급을 당하여 매매되고,

그 노예를 산 사람들은 그들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가 있었다. 이런 노예의 운명은 비참한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해 조금의 자유가 없었고 온전히 주인 소유물에 불과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사람을 자기와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자 신자들은 노예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다.

교회에서는 될 수 있는데까지 노예를 보호했으나 도저히 노예제도는 없앨 길이 없었다.

그래서 배상금을 모금하거나 혹은 좋은 훈계로써 그들을 석방시키도록 하는 동시에,

적어도 그들을 위안해 주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많은 열심한 신자들과 사제들은 기부금을 거둬

이런 좋은 자선 사업에 충당하는 등 이 자선 사업에 전력을 다했다.

그 중에도 이런 가련한 노예를 위해 가장 크게 활동한 최대의 은인은 아마 성 베드로 클라베르일 것이다.

당시의 노예는 대개가 흑인이었으며 그들은 백인보다 더욱 심각한 학대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나섰고. 때로는 자신을 흑인의 노예라고까지 불렀다.

 

Slave of the Blacks, Slave of the Slaves.

 

 

 

 

그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근교 베르두에서 태어나 일찍이 신부가 되려는 마음을 가졌었다.

그래서 부모는 그를 바르셀로나에 보내어 공부를 시켰는데 성적도 매우 우수했다.

그곳에서 그는 예수회의 회원들과 자주 접촉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그 회에 입회하게 되었다.

 

수련이 끝나자 그는 흑인 노예를 개종시키기 위해 남미에 파견해 줄 것을 청했다.

그 즉시 승낙을 얻지는 못했으나 1610년에 뉴 그라나다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남미에 도착하자, 규정된 학문과정을 마치고 신품 준비를 해 1615년 카르타제나에서 서품되었다.

이미 자신은 그만한 학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르셀로나에서 친하게 지냈던

평수사 성 알폰소 로드리게스(축일:10월30일)로 부터 완덕에 대한 수덕 신학을 배웠다.

그가 흑인 노예에게 전교를 하게된 연유는 성스러운 친구의 덕택이 컸던 것이다.

 

그는 학문을 닦고 준비를 한 후 흑인 노예들에게 전교하기 위해 부임했다.

카르타제나 지방에서는 광산, 도시, 농천 할 것 없이 많은 노예들이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매년 1만명 내지 1만2천 명씩 수입되어 짐승과 같이 매매되고 혹사되는 것이었다.

그 중에는 혹은 병에 걸리고 혹은 절망적 상태에 빠져

주인이나 감독에게 불붙는 듯한 반감과 증오심을 품은 자도 적지 않았다.

 

베드로는 이런 가련한 자들을 위로해 주기 위해 부임된 것이라 선내(船內)에서부터

과일과 과자를 나누어 주며 갖은 친절을 다해 그들과 접근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들은 이 역시 자기네들을 학대하는 동료인 줄 알고 도저히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베드로의 변함없는 친절에 그들은 안심하고 차차 가까워졌다.

 

 

성부와 성자와 함께 성 이냐시오.

 

베드로는 그들을 위로하고 하느님의 사역이나 예수에 대해서

그 수난하심과 부활하심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들은 아직 천주교를 몰랐으므로 이런 말들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는또한 어린이나 병자들을 알뜰히 보살펴 상처를 씻겨 주고 약을 발라 주며

부모보다도 더한 깊은 애정으로써 대했다.

이러한 사랑의 행실이 헛된 일일 리가 없었다.

불행한 사람들은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이 생각하고 따르며 타인에게는 결코 걸 수 없는 신뢰를 갖게 되었다.

 

베드로는 그들을 위해 여러 가지를 궁리했다. 그들의 오락을 위해 악기를 사다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자기를 가까이 하지 않는 흑인,

혹은 자기를 멸시하고 욕을 하는 흑인들에게도 똑같은 친절로써 대해 주었다.

노예의 주인들은 그의 일을 방해하는때가 물론 가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과 노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능히 극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랑의 행위는 전교상에도 대단한 성과를 냈다.

그가 노예를 위해 일한 44년간에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수효는 30만을 훨씬 초과했다고 한다.

그는 깊은 산골에 있는 흑인 노예들에게 전교를 하기 위해, 또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기 위해

강을 건너고 늪을 지나며, 밀림 속의 맹수들과 싸우며 먼데까지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어려움도 달갑게 생각하는 베드로의 열심이 하느님 대전에 의합되었음인지,

가끔 그의 기도로 기적도 일어나곤 했다.

이러한 베드로의 존재는 사방에 알려져 이제는 흑인 노예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의 도움을 구하러 오는 이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부탁을 받은 일은 결코 거절하지 않으며 상대가 천주교이건

회교인이건 토인이건 외국인이건을 막론하고 아무 차별 없이 가능한 모든 도움을 주었다.

그는 많은 기도를 바치고 낮에 시간이 없으면 밤에라도 이를 행하고,

게다가 준엄한 고행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몸을 괴롭히면서도 그런 활동을 했다는 것은 이 역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순명과 청빈에 대한 덕은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그의 인내심이며 부드러운 마음씨는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는데,

실은 그의 본래의 성질은 그와 반대였으나 수덕의 결과로 이같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1650년, 그는 어떤 페스트 환자에게서 병이 전염되어 겨우 생명은 건졌으나 몸이 매우 허약해졌다.

그로부터 4년 후 그를 돕기위해 사제 한 분이 유럽에서 파견되어 왔다.

몸이 쇠약해져 마음대로 활동을 못하는 그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생명이 붙어있는 동안 자기의 의무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의 위독함이 전해지자 전 시민은 비탄에 잠기고 위문객들은 쇄도해 왔다.

그가 영원히 쉬게 된 날은 1654년 성 마리아의 탄생 축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74세였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Ad Majorem Dei Gloriam)


 
1. 예수회의 기원
예수회는 성 이냐시오 로욜라와 그의 '영신수련'(靈神修練)으로 단련받은 초대회원들로 부터 유래한다.

그들의 시대는 16세기의 대격변기였고 종교개혁의 시대였다. 성 이냐시오가 '주님안의 벗들'이라고 부른

그의 동료들은 오로지 하느님만을 섬기려는 열망으로 자신들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여 찾았다.

하느님의 섭리는 이냐시오 성인을 통해서 복음적 권고를 따르는 삶가운데 새로운 생활양식을 일으켜

하느님 백성의 모임인 교회에 봉사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공동으로 갖게된 비젼안에서 고유한 예수회의 생활양식이 자라났으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가진 성직 수도회가 결성되었다.

예수회는 1540년에 사도좌의 인가를 받아 교회 안에서 탄생하였다.

 

2. 예수회의 행동양식
예수회의 유일한 목적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회원 자신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웃의 구원과 완덕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하는데 있다. 더우기 그 모든것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 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이 목적은 예수회의 행동양식을 결정하며, 예수회를 수도적이면서 특히 사도적인 단체로 만든다.

예수회의 사도적 활동은 세계 전역을 대상으로 하고 제한없는 기동성을 요구하며 더 어려운 사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한다. 따라서 교회의 필요에 즉각적으로 응해 어디나 가서 활동할 자유를 얻기 위해,

이전의 전통적인 수도생활 양식 안에 있던 여러가지 방해 요소들을 과감히 포기하여

근본적으로 쇄신된 수도생활 양식이 성립되었다.

 

예수회의 행동양식은 '영신수련'(靈神修練)을 통해 관상한 그리스도, 즉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전적인 자기헌신에서 나오는 영적이며 인간적인 태도이다.

그리스도는 예수회원 모두에게 삶과 일의 원형이 되시며, 또한 각자의 상황안에서 사도적 적응성을 가지고

항상 '그 이상의 것'을 선택하도록 재촉하신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회원은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관상가가 되며,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과의

특별한 유대속에서 교회와 함께하는 정신으로 봉사한다.

예수회원은 무상으로 봉사할 마음을 가지며, 기도로써 길러지고 체득된 식별의 감각을 지니고

세상안에서 활동한다. 예수회 전통은 봉사의 질과 자기도야에 있어 엄격함을 유지하여 왔으며,

인간적인 것에 대한 고결한 감각으로 참으로 인간다운 것을 존중한다.

예수회원의 행동양식은 외면상으로는 평범하고 또 그것을 추구하나,

내적으로는 자신의 목적의 탁월한 완성을 위해 노력한다.


3.오늘날의 예수회원
예수회는 그 시대와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관상하면서 영감을 받아

거기에서 사도적 활동력을 보존할 통찰을 길어 내었다.

따라서 우리시대 인간들의 염원과 필요를 보되 그리스도의 눈으로 봄으로써,

오늘날의 예수회원들은 스스로의 신원과 사명을 자각한다.

오늘의 예수회원은 이냐시오와 같이 '예수의 벗'으로 부름받았음을 인식하면서,

'주님 안의 벗들'인 동료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께 결속하여,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투쟁인 신앙의 봉사와 신앙에 내포된

정의 구현에 헌신하는 사명을 받아 파견된 사람이다.

예수회원은 세가지 서원을 통해 이러한 봉사에 필요한 사도적 자유를 얻어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면서 세계의 현실 한 가운데로 뛰어든다.

 

 

예수회 Society of Jesus,

               

colombia. Mass in Prison

        

 

Campesinos at Buga, Colombia

 

colombia.Training in the use of Wheelchai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