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섬김의 리더십, 섬김의 영성

수성구 2022. 9. 3. 06:46

섬김의 리더십, 섬김의 영성

 

 

1코린 4,6-15; 루카 6,1-5 /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2022.9.3.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인물은 전례 음악, 윤리와 신앙에 관한 저술 등으로 교황직의 이정표를 세운 그레고리오 교황입니다. 하지만 그가 위대한 이유는 교회역사상 최초로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자처하며 섬김의 리더십과 영성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이 호칭은 그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사제 직무를 위임하시며 내려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행동으로 보여주신 세족례의 모범을 깊이 묵상한 결과입니다. 스승이신 분이 제자들 앞에 종처럼 무릎을 꿇고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한낱 죄인들 앞에 종처럼 무릎을 꿇고 그런 섬김이 사랑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종으로서 다스리시는 왕이셨습니다. 이 상호 섬김의 굳건한 카리스마 위에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당신을 기억하고 계승하여 성체성사를 거행하라고 위임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을 본받기 위해 행해야 할 그리스도 왕직입니다. 

 

  그레고리오 교황이 공식적으로 교황직의 호칭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붙인 까닭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몸소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들, 그러니까 당신의 열두 제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역사상 후계 제자들에게까지 명령하신 지엄한 요구사항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호칭은 그레고리오 교황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역대 교황은 물론 모든 주교와 신부들, 그뿐만 아니라 수도자나 평신도 안에서도 봉사하도록 선출되거나 임명된 모든 일꾼들에게 두루두루 포함되는 교계적 지혜로서 말하자면 일종의 가톨릭 코드였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이 소수 봉사자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본을 보고 또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본을 보여주어야 할 모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호 섬김의 길을 걸으면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교우들에게도 함께 걷자고 권고하였습니다.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된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들을 본받아 교우들이 상호 섬김의 진리를 깨우치게 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로운 사람이 되리라고 장담하였습니다. 자신을 비롯한 사도들은 마치 사형 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며 보수 없이 자신들의 손으로 애써 일하면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처럼 세상에서 멸시받는 구경거리요 쓰레기가 되었지만, 이는 이 상호 섬김의 진리를 본받는 교우들로 하여금 명예롭고 강하며 자랑스럽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위시해서 사도들은 사람들이 욕을 해도 축복해주고 박해를 하면 참아 견디며 중상 모욕을 해도 좋은 말로 응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겸손한 표양으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려고 사도들 모두의 이야기로 하고 있지만, 어쨌든 이러한 사도적 표양은 이미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상호 섬김의 삶이야말로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라고 그분이 가르치신 것입니다. 세상이 아직도 이 진리를 우습게 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본을 보여준 것처럼, 욕을 해도 축복해주어야 하고 박해를 해도 견디어 내어야 하며, 중상모략을 해도 좋은 말로 응답해 주어야 합니다. 박해시대에 우리 신앙 선조들 역시 사도들의 모범을 따른 섬김의 표양으로 결국 이 민족의 문명을 앞당겼습니다. 

 

  하지만 이 박해와 저항 그리고 치명으로 섬김의 영성을 증거했던 천주교 역사에 대해서 일반 역사가들의 평가는 매우 인색한 편이어서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동학 혁명의 평가에도 못 미칩니다. 개신교는 천주교 신자들이 피 흘려 얻은 신앙의 자유로 무혈입성한 처지이면서도 그들의 교회사가들은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 역사를 아예 없었던 것처럼 무시합니다. 이벽 세례자 요한의 성교요지가 위조된 필사본으로 세상에 나타났다 해도 그가 우리 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신앙의 진리를 알아보고 지은 성교요지의 위대한 가치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또 황사영 알렉산더의 백서가 나라의 안보를 위태롭게 했다고 하지만 국가 권력이 자행한 1947년 제주 4·3 사태나 1980년 광주 5·18 사태의 폭력이 합법화될 수 없듯이, 당시 조정과 유림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조상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윤리 풍속의 문제만으로 왕이나 백성을 향해 칼끝을 겨눈 적이 없었던 자기 백성을 그토록 잔인하고 끔찍하게 죽여 버린 일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이미 남북한과 중국에서 항일투쟁의 선봉으로 추앙받고 있는 안중근 토마스의 하얼빈 의거가 한낱 사람을 죽인 살인사건으로 격하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시복·시성 여부와 상관없이 옥중에서 자기 목숨과 맞바꾼 ‘동양평화론’으로 인하여 안중근은 동북아시아 평화의 아이콘으로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상호 섬김의 리더십과 영성은 우리 자신은 물론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이룩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억하고 우리도 이를 본받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