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수성구 2022. 8. 26. 05:00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1코린 1.17-25; 마태 24,1-13 /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2022.8.26.; 이기우 신부

 

  사도 바오로는 두 번째 선교여행에서 코린토를 찾아갔습니다. 필리피, 데살로니카, 아네테를 거쳐서 갔는데, 그 어느 곳 하나 선교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아시아로 가려던 선교일정이 벽에 부딛쳐서 고민하던 차에, 트로아스에서 꿈에 본 성령께서 서방으로 가라고 일러주셔서 갔을 뿐인데 가는 곳마다 실패만 거듭했던 것입니다. 이 무렵 사도 바오로는 기성 사도들이 할례 받은 유다인들에게 선교하겠다던 노선에 밀려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선교하겠다고 양보하고, 그들이 선교하지 않는 곳을 골라서 선교하겠노라고 천명한 터였습니다. 비주류 사도로서의 설움을 느낄 만도 한데 바오로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 자신감의 원천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숙하다던가 로마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던가 하는, 세속적인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천상적인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코린토에 갔을 당시에 로마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상선은 코린토에 많은 교역 상품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시민들은 흥청망청 댈 수 있을 만큼 부유했습니다. 그 부유함에 기대어 더 많이 벌고자 하는 마음에 우상숭배도 성행했던 그 도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이 아직도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표징을 복음의 수용 조건으로서 요구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코린토의 그리스인들은 수백 년 전부터 자신들의 조상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인간 이성으로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지혜를 그때까지도 찾고 있어서 복음 선포가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오로는 허투루 세례를 주어서 신자를 확보하겠다는 생각을 일찌감치 버렸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이 요구하던 표징이나 그리스인들이 찾던 지혜조차도 엄두가 나지 않아서, 아예 자신의 인간적 재주로 해내겠다던 애초의 계획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사실 사도 바오로의 인간적 재주는 국제적 교육과 전통적 교육을 겸비하였기에 누구보다도 뛰어났었지만, 현명하게도 그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예수님의 신성에 의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에 대한 의지 표명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어 보이겠지만, 구원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하는 선언입니다. 

 

  십자가의 진리에 대한 이러한 확신은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확신하게 되었던 바이기도 하고, 자신의 선교 경험에서 우러나온 교훈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수없이 많은 표징들을 보여주셨지만 애시당초 신앙이 없으면 그 표징들을 보아도 믿음이 생겨날 계제가 되지 않았었습니다. 되려 지혜롭다던 바리사이들은 그 표징들을 볼 때마다 트집을 잡아 기어코 그분을 죽이려 들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찾던 지혜에 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사도 바오로가 익숙한 바였지만, 인간 이성으로 고안된 지혜란 또 다른 지혜로 맞서기 마련인지라 애시당초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탈레스 이래 소크라테스에 이르기까지 그리스인들의 지혜란 결국 피조물에게서 나온 산물이어서 창조주의 지혜에 비길 바가 되지 못했던 까닭입니다. 그리스인들의 지혜를 헬레니즘이라 하지만, 오늘날까지 그리스를 정신적 고향으로 삼는 유럽인들이 이룩한 물질문명이 경제적으로는 부유해도 정신적으로는 빈곤한 것도 똑같은 이유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요구한 표징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응수하셨습니다. 자신의 희생을 전제한 응답만이 힘과 권위를 가지는 법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본 사도 바오로 역시 코린토에서 선교하면서 십자가를 짊어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쉽게 선교할 생각을 처음부터 먹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에 대한 표현이,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1코린 1,23)이시라고 확신한 발언입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자비를 독차지했던 유다인들이 부르심과 자비를 믿지 못하고 불신에 가득 차서 끊임없이 표징을 요구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희한합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를 혼인 잔치의 들러리로 온 열 처녀에 비기셨겠습니까? 혼인 들러리라면 당연히 기름을 채운 등을 지니고 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열 중 다섯은 미련해서 기름도 없는 등을 들고 신랑을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현명한 다섯 들러리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했다가 신랑을 기다려서 신부를 에워싸고 혼인 잔치에 들어갔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주님께서 오실 그 날과 그 시간을 기다린 사람들이고 깨어 있던 이들이었습니다. 역사에서 십자가의 진리를 명심하고 깨어 기다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리가 힘과 이성을 이깁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5). 

 

  교우 여러분!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십자가야말로 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