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구원 경륜과 의지
에제 36,23-28; 마태 22,1-14 /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2022.8.18.;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밝혀주었습니다. 이로써 하느님께서 인류 전체를 구원하실 당신의 경륜을 펼치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보면 이 백성은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가로막았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까지도 알아보지 못한 것도 모자라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참으로 아쉽고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고 인류 구원을 위한 계획을 알려주시며 이에 협력할 파트너십을 요청하시고자 숱한 예언자들을 보내신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이 유일합니다. 한민족에게는 보내지 않으셨던 이런 예언자들의 출현과 존재가 한없이 부럽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로 하늘 나라를 가르치셨는데, 여기에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에제키엘이 계시받은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더하여 강력한 구원 의지까지 밝혀진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외면당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최후의 심판까지 갈 것도 없이 현세 역사에서 심판하셨고, 그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 후 2천 년 동안 전 세계로 흩어져 떠돌아 다녀야했고 20세기에 들어서 겨우 원 고향 땅에 자리를 잡기는 했으나 주변 아랍 민족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으며, 원주민들에게는 그 옛날 아시리아가 부리던 행패를 그대로 흉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 어느 민족으로부터도 이스라엘 민족과 국가는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로 인해서 하느님께서는 그 어떠한 영광도 받지 못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경륜은 한 치도 실현되고 못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 모범을 본받아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증거함으로써 끝내 로마제국을 그리스도교화시켰습니다. 하늘 나라를 위한 혼인 잔치를 연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덕적 타락과 경제적 부패로 로마제국은 멸망했으나, 로마의 실패를 딛고 일어선 교회는 그 후광을 힘입어 유럽에서 주도권을 쥐고 문명을 일으켰고 전 세계에 십자가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준비된 혼인 잔치에 오지 않겠다던 이스라엘 백성 대신에 유럽을 비롯하여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등 모든 대륙의 백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이를 두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을 앞두고 모인 아시아의 주교들에게 이렇게 회고하며 기대를 표명하였습니다: “전 세계의 교회와 함께, 아시아 교회는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신 모든 것에 경탄하면서, 그리고 제1천년기에는 십자가가 유럽 땅에 심어지고, 제2천년기에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심어졌던 것처럼, 제3천년기에는 이처럼 광대하고 생동적인 이 대륙에서 신앙의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그리스도교 제3천년기의 문턱을 넘어갈 것입니다”(교황권고, 「아시아 교회」, 1항). 하지만 십자가가 제1천년기와 제2천년기에 유럽과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심어지는 동안에, 혼인 잔치 자리에는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데려온 것처럼, 복음적인 방식과 사랑의 실천으로만 십자가를 심은 것이 아니었고 노예 무역과 원주민 학살과 현지 종교 말살과 현지 문화 탄압이라는 강자의 업보가 가리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을 이끄시는 성령의 손길이 깡그리 무시된 것입니다.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에게는 잔치 자리를 가득 채우고 싶은 구원 경륜도 중요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구원 의지였습니다. 즉, 하느님 나라를 전하되 사랑의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혼인 예복입니다. 그래서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들어온 사람들은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아닌 세속적인 힘의 방식으로 개종을 강요해 봐야 그들은 교회가 바라는 믿음의 삶에 남아 있지 못합니다. 스스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아 대륙에서 힘의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려 했던 유럽 선교사들이 2백 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에까지 배척과 의심의 눈길을 받는 것은 인과응보(因果應報)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역사적 비유와 또 이러한 역사적 교훈도 알고 있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주교들의 희망을 담아 제3천년기에 아시아에서 얻기를 기대하는 신앙의 큰 수확은 ‘그리스도교화된 아시아 대륙’이 아니라 ‘사랑의 문명’입니다. 유럽 그리스도교가 주도한 현재 물질문명의 비인간화 그늘에도 빛을 비추어 줄, 그래서 아시아만이 아니라 온 인류가 그 혜택을 입을 수 있는 ‘사랑의 문명’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희망에 동의하면서도, 아시아 주교들은 그러기 위해서는 ‘3중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교황에게 건의했습니다. 아시아의 종교들과 경쟁하려 들지 말고 대화해야 하고, 아시아의 문화들을 깔보지 말고 존중해야 하며, 이미 서구화된 아시아의 엘리트들이 아니라 아시아적 종교 영성과 문화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 ‘3중의 대화’이며, 이것이 아시아 복음화라는 혼인 잔치를 위한 예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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