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연중 제18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수성구 2022. 7. 31. 00:59

연중 제18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18주일: 다해

복음: 루카 12,13-21: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 이 말씀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반향 되고 있다. 허무다(hèbhel)라는 단어가 코헬렛에 22번이 나온다. 그 본래 의미는 수증기, 숨을 의미하여 폐에서 콧구멍과 입에 이르자마자 없어지는 숨처럼 단기적이고 단명한 모든 것을 말한다.

 

인간에게 확실한 보증이 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고 코헬렛은 말한다. 돈이라는 것도 인간에게 확실한 보증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내일에 대한 수고와 걱정과 불안에 대해 돈이 과연 무엇을 보상해줄 수 있느냐고! 그러므로 돈을 쌓기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복음에 나오는 부자처럼 보통 두 가지 위험에 부딪히게 된다. 갑자기 닥치는 죽음의 함정에 빠지기 때문에 자기의 재화를 누릴 수가 없고, 자신의 고뇌를 행복과 평온으로 보상받을 수 없다. 즉 부자가 된 그는 이제 그렇게 애써 모은 재화를 지키기 위해 밤에도 마음을 죄어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코헬렛의 내용은 세상의 것들의 일시성과 잠정성을 알게 함으로써 인간을 고통과 실망 속에 떨어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라고 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부(富)에 들어가게 한다. 이렇게 복된 가난한 이들에 이르는 길을 준비하고 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재화 앞에서 절대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재산분배 문제에 있어서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첫째로 인간은 그 내부로부터 이기주의라는 악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기주의를 치료함으로써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고 폐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유산의 공평한 심판자처럼 행동하려 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기를 요청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선 필요한 가르침이다. 두 번째 가르침은 재화와는 관계가 없는 인격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관한 것이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15절). 많은 사람이 그들이 가진 재산이 자신들의 생명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정반대의 의미이다. 소중하게 여긴 그 재화가 생명을 지켜주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생명을 잃게 한다. 즉 애덕과 사랑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개방하지 않고, 재화를 쌓는 일에만 몰두하여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21절)이 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기만 생각하는 부자의 이기심은 자기 자신을 망치는 것이 되고, 스스로 자신을 자신이 지은 감옥에 가두는 결과를 내는 것이다. 여기서 그 자신 안에는 다른 사람은 전혀 존재할 수 없고 그의 재산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죽음은 그에게 허무를 안겨주는 모습이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20절). 생명과 재산이 그에게는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죽음으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 지혜롭고 능력이 있어 보였던 그가 어리석은 자로 드러나고 있다. 성경에서 어리석다는 개념은 하느님을 모르는 체하고(시편 14,1) 잘못된 근거에 자신의 신뢰심을 두는 사람으로 하느님을 거부한 후 스스로 자신의 우상을 만들어 가는 사람을 말한다. 이렇게 이 부자는 아둔하고 앞을 내다볼 줄 모르고 전혀 가진 것이 없는 어리석고 가난한 자이다. 자신이 죽는 순간에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을 전혀 갖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21절).

 

묵시록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3,17). 세상에서 재화와 재물에 집착하여 거기에 매여 노예가 되는 모습이다. 여기서는 재화와 재물이 하느님보다 더 섬김을 받게 되니 그것이 우상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우상에서 벗어나 올바로 주님을 섬기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심과 사랑에 대해 신뢰심을 가질 것을 권고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 세상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카 12,29-31).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 세상의 재화나 재물에 매여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주인으로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그 재물이나 재화에 집착하고 거기에 온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면 그 자체가 이미 우상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것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재물이나 재화의 노예가 아니고 주인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주인이 된다는 것은 그 재물이 그것을 만드신 주님의 뜻에 따라서 올바로 사용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2-3). 하느님 앞에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