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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3일(15기도)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

수성구 2022. 7. 23. 03:45

7월 23일(15기도)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

축일: 7월23일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

Santa Brigida di Svezia Religiosa

Saint Bridget (Birgitta) of Sweden - Benedictine

Uppsala, Svezia, 1303 - Roma, 23 luglio 1373

Born:1302-1303 at Finsta Castle, Uppsala, Sweden

Died :23 July 1373 at Rome, Italy; buried in 1374 at the Vadstena,

Sweden convent she founded

Canonized:7 October 1391 by Pope Boniface IX

Brigida (come Brigitta) = alta, forte, potente, dall'irlandese

(like Brigitta) = high, strong, powerful, dall'irlandese

 

 

 

 

스웨덴 업랜드의 총독이며 부유한 지주인 비르겔 페르쏜과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잉그보르그 벵츠도터의 딸로 브리지타는 1303년 7월 14일에 태어났다.

브리지타가 12살 되던 해 어머니가 죽자, 그녀는 아스펜나스에서 성장하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환시를 여러 번 체험하였다.

그녀는 불과 14살의 어린 나이로 당시 18세의 귀족이던 울프 구드마쏜과 결혼하여 8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 중의 하나가 스웨덴의 성녀 가타리나이다.

 

남편이 된 울포는 아직 어리지만 성스러운 아내에게 합당한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내를 깊이 존경하고 그 성덕을 본받으려 노력했다.

그들은 다같이 프란치스코 제3회에 들어가 서로 격려하며 경건한 생활을 했다.

 

1335년, 그녀는 스웨덴의 왕 마뉴스 2세와 막 결혼한 나무르의 불랑슈의 시녀가 되었다.

브리지타의 큰 딸이 결혼에 실패하고, 또 그녀의 막내 아들이 1340년에 죽게 되자,

그녀는 노르웨이 트론디엠의 성 올리프 경당으로 순례여행을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궁중을 떠나기로 결심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꼼포스뗄라로 재차 순례길에 올랐다.

그러나 아라스에서 병을 얻었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알바스트라의 씨토 수도원에서 극도로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4년을 지냈다.

 

이 때에도 그녀는 수많은 환시와 계시를 받았고, 고해신부는 그녀의 모든 환시가 올바르다고 보증해 주었다.

이러한 계시에 따라 그녀는 1344년애 바드스테나에 수도원을 세웠고,

이것이 성삼회(비르지타회)의 시작이다.

바드스테나는 15세기 스웨덴의 지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그녀는 이방인 렛트와 에스토니아인들을 대항하는 국왕 마뉴스의 십자군 지원을 거부하였다.

 

그녀는 당시 아비뇽에 유배 중이던 교황 끌레멘스 6세에게 글을 보내어, 자신의 환시 내용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교황은 안전하게 로마로 돌아가실 것이고,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평화에 교황이 중재자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많은 시간을 로마에서 지내면서, 매우 엄격한 생활과 빈민구제에 온 정열을 쏟았으며,

당시의 심각한 교회와 정치사이의 문제에 대하여 기탄 없는 충고를 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엄격한 생활과 성덕, 가난한 사람들과 순례자들에 대한 관심 및

교황의 로마 귀환에 대한 노력 등이 로마 전체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녀는 로마 주변의 수도원들을 개혁하였고,  빈민구제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1373년 로마에서 선종하였다.

 

그녀의 예언과 고위직책에 대한 탄핵은 유명하였다.

그녀는 교황이 로마로 돌아오는 문제를 위하여 계속 노력하였으나,우르반 교황만이 잠시 귀향하였고,

그의 후임자 그레고리오 11세는 여전히 아비뇽에 있었다.

그녀의 구술로 적은 "계시"라는 책에는 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미래의 사건들에 대한 내용으로

당시대에 강한 반항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그녀의 시성과 콘스탄티노 공의회에서 그러하였다.

어떤 신학자들은 그녀가 정통 교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역설한 반면,

또 다른 학자들은 그의 체험들은 모두가 진실하며 교리와도 부합된다고 갑론을박하였다.

그녀의 사후, 트랜트 공의회는 요한 토르케마다가 저술한 그녀의 "계시"를 세심히 검토케 하였는데,

결국 신자들이 읽어도 좋다는 판정을 내렸다.

 

 

에밀리 디킨슨은 이렇게 말했다.

"책과 비교될 만한 배는 없다. 책은 우리를 먼 곳으로 보내 준다.

" 당신이 만약 무인도에 간다면 꼭 가져가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아마 책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비르지타도 책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엄격한 청빈 생활을 하면서도 책을 구입하는 데는 망설임이 없었다.

수도회의 회칙을 정하면서 일정 소득 이상의 수입은

모두 가난한 사람을 돕는 데 써야 한다는 엄격한 규칙을 세웠지만

책만큼은 누구든지 원하는 대로 가질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두었을 정도였다.

비르지타는 수도 생활을 하기 전 28년 동안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면서 8명의 아이를 두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처럼 책을 좋아했던 것 같지는 않다.

8명의 자녀 중 한 명은 성인이 되었지만

다른 자녀들은 불륜을 저지르는 등 올바른 생활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홈에서 www.ofmconv.or.kr)

 

 

Revelations of St Bridget of Sweden - MINIATURIST, Italian

c. 1400.Illumination on parchment, 26,8 x 19 cm.Pierpont Morgan Library, New York

 

 

성녀 비르지따가 쓴 것으로 보이는 기도문에서

(Oratio 2: Revelationum S. Birgittae libri, 2, Romae 1628, pp.408-410)

 

구세주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영혼의 승화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찬미 받으소서.

당신은 죽음을 예고하시고, 최후만찬 때 물질인 빵을 축성하시어

신묘히 당신의 보배로운 몸으로 변형시키시고,

그것을 당신의 지극히 숭고한 수난의 기념으로 사도들에게 인자로이 남겨 주시며,

당신의 거룩하고 성스러운 손으로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써 위대한 겸손을 보여 주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영예 받으소서,

당신은 수난과 죽음의 공포로 말미암아 그 순결한 몸에서 피땀을 흘리시고

원하신 대로 우리 구속을 성취하시어 인류에게 품으신 사랑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찬미 받으소서,

당신은 가야파에게 끌려가시어 온 인류의 심판관이신 당신이

빌라도의 재판에 넘겨지는 것을 겸손히 허락하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영광 받으소서.

당신은 자색 홍포를 입고 날카로운 가시로 엮어 짠 가시관을 쓰신 채 조롱당하시고,

당신의 영예로운 얼굴이 침 뱉음 당하고 눈을 가리우며 얼굴과 몸이

악인들의 잔인한 손으로 무참하게 맞는 것을 인내로이 참으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찬양 받으소서.

당신은 기둥에 묶이시어 참혹하게 채찍질당하시며, 피에 젖은 채 빌라도의 재판장으로 끌려가시어

순결한 어린양으로 드러내시는 것을 인내로이 허락하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영예 받으소서.

당신은 그 영광스러운 몸이 피로 범벅이된 채 십자가 형을 받으시고,

고통에 짖눌린 당신의 거룩한 어깨에 십자가를 메시고

사람들이 분노하여 외치는 가운데 수난의 장소로 끌려가시어,

옷 벗긴 채 십자가 나무에 못박히시길 원하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영원토록 영예 받으소서.

당신은 결코 죄를 짓지 않고 미소한 죄마저 허락치 않으신 당신의 영광스런 어머니가

그렇게도 격심한 고뇌 가운데 계신 것을 보실 때 사랑에 젖은 인자한 눈으로 겸손히 내려다보시고

또 그 분을 위로해 주시면서 당신 제자의 충실한 돌봄에 맡기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영원토록 찬미 받으소서.

당신은 당신께로 돌아온 강도에게 천국의 영광을 자비로이 약속하실 때 죽음의 고뇌 가운데서

모든 죄인들에게 죄 사함의 희망을 주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영원토록 찬양 받으소서.

당신은 수시간 동안 우리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 상에서 한없는 슬픔과 쓰라림을 당하시고,

상처의 예리한 고통은 당신의 복된 영혼까지 꿰뚫고 지극히 거룩한 심장까지 무참히 찔러

마침내 그것을 헤쳐 놓아 기쁘게 숨을 거두셨습니다.

당신은 또 머리를 숙이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손에 자신을 겸손되이 맡기시고 죽으시어

차디찬 몸으로 십자가에 달려 계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찬미 받으소서.

당신은 보혈과 지극히 거룩한 죽음으로 영혼들을 구속하시고 유배지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자비로이 이끄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찬미 받으소서.

당신은 우리 구원을 위해 늑방과 심장이 창으로 찔리우는 것을 허락하시고,

그 늑방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자 보혈과 물을 쏟으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영광 받으소서.

당신은 그 거룩한 몸이 벗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내려져 슬픔에 젖은 당신 어머니의 팔에 안기기를 원하시고,

어머니께서 당신 몸을 수의로 싸서 무덤에 묻고 병사들이 지키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영원토록 영예 받으소서.

당신은 삼일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뽑으신 사람들에게 당신이 살아 계심을 드러내 보이시고,

사십 일 후에 많은 이들이 보는 데서 승천하시어 고성소에서 해방시키기신 당신의 벗들이

하늘의 영광에 들도록 하셨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영원토록 기쁨과 찬양 받으소서.

당신은 제자들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시어

그들의 영혼 안에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증가시키셨습니다.

 

내 주 예수여, 영원토록 찬미와 찬양과 영광을 받으소서.

당신은 당신 신성의 영광안에서 하늘 나라의 옥좌에 앉아 계시고

동정녀에게서 육신을 취하실 때 지니신 모든 거룩한 지체들과 함께 육신으로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심판 날에 산 이와 죽은 이들의 영혼을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당신은 성부와 성령과 함께 세세에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스웨덴 업랜드의 총독이며 부유한 지주인 비르겔 페르손과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잉그보르그 벵츠도터의 딸인 비르지타는 1303년 7월 14일에 다섯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다른 자녀들보다 경건해 처음부터 환시를 여러 번 체험했고

성모께서 그녀에게 발현하시는 특은도 받았다.

열 살 때에 또 성모께서 발현하시어

그녀의 머리 위에 뒷날의 사명의 표지(標識)로 광채 찬란한 관을 씌워 주시었다.

 

1311년 사순시기 때, 즉 비르지타가 열 한 살 되던 해,

예수 수난에 대한 강론을 듣고 깊이 감동해 밤새도록 생각에 잠겨 있을때,

처음에는 눈부시게 찬란한 광채가 보이고 이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투성이가 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비르지타는 마음이 아파서 "예수님! 당신을 이토록 만든 자는 누구입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께서는

"나를 경멸하는 사람, 내사랑을 잊는 사람" 이라고 대답하셨다 한다.

그때부터 비르지타는 주로 예수 수난에 대해 묵상했다.

 

 

그 해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 잉그보르그가 세상을 떠나자,

비르지타는 언니와 같이 큰어머니 댁인 아스펜나스에 가 있게 되었다.

큰 어머니는 이 두아이에 대해 특히 유의하며 교육을 시켰고,

더욱이 비르지타는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눈치채고 더욱 조심히 가르쳤다.

그럼에도 그 아버지 비르겔은 비르지타의 적당한 배우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녀는 겨우 14세때에 울포라는 귀족 청년에게서 구혼을 받았다.

비르지타는 매우 슬퍼했고 결혼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려 했으나

순명하는 마음으로 하는 수 없이 승낙했다.

 

남편이 된 울포는 아직 어리지만 성스러운 아내에게 합당한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내를 깊이 존경하고 그 성덕을 본받으려 노력했다.

그들은 다같이 프란치스코 제3회에 들어가 서로 격려하며 경건한 생활을 했다.

그동안 울포는 어떤 주(州)의 총독이 되어 자신을 돌볼 새 없이 백성들을 위해 일하고 정의의 선정을 베풀었다.

그런 환경에서는 그때 상류 사회의 풍속대로 비르지타도 나서서 손님을 만찬에 초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일단 그 일이 끝나면 자기 방에 돌아와 교회를 위한 일 또는 빈민 구제를 위한 일에 열중했다.

그리고 줄곧 성인전이나 교부들의 서적 특히 성그레고리오의 서적을 탐독했다.

 

 

비르지타에게는 여덟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 중 마르타라는 딸과 가롤로라는 아들은 항상 그의 걱정거리였다.

마르타는 허영심이 많아 쾌락을 즐겼고, 가롤로는 의지박약한 성격에다 방탕에 흘렀다.

그러나 경건한 어머니의 눈불과 기도는 마침내 승리를 거두어 가롤로는

저 멀리 나폴리에서 자기가 범한 모든 죄를 진실히 통회하고 세상을 떠났다.

 

스웨덴 국왕 마뉴스2세는 어려서 왕비 나무르의 블랑슈를 맞이하고

비르지타를 그녀의 으뜸시녀로 세워 내실을 전부 도맡아 다스리도록 했다.

처음에 비르지타는 이를 사양했으나 끝내 거절치 못하고 결국 승낙했다.

그녀는 궁중의 모든 일을 현명하고 두터운 애정으로 처리했다.

이처럼 그녀는 모든 이에게 성덕의 표양을 보여 궁중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를 존경햇다.

그리고 그녀가 번쩍이는 비단옷 밑에 거친 옷을 입고 엄격한 재를 지키며,

때로는 철야 기도롤 밤을 새우는 것을 아고는 더욱 더 존경하게 되엇다.

 

유감스러운 것은 아직 사리를 제대로 분별 못하는 국왕과 왕비가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에만 정신이 팔려 비르지타의 성스러운 생활에는 조금도 감동되는 기색이 없었다.

비르지타는 간청해도 들어 줄 것 같지 않아, 휴가를 청해 남편과 함께 콤포스텔라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순례 도중 울포는 아라스라는 곳에서 큰 병에 걸렸다.

그는 병이 완쾌되면 수도원에 들어가겠다는 서원을 했다.

하느님의 섭리로 울포의 병은 완쾌되어 그는 하느님께 드린 서원대로 비르지타의 동의를 얻어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가 평수사가 되었고

열심히 수도 생활 하다가 다시 중병에 걸려 훌륭한 최후로 일생을 마쳤다.

 

 

뜻하지 않게 과부가 된 비르지타는 알바스트라 수녀원 원장의 승낙을 얻어 수녀원 부속 건물을 한 칸 빌려,

그곳에서 지상의 생활이라기 보다 오히려 천상 생활이라 할 수 있는 엄격한 고신 극기의 나날을 보냈다.

 

그동안 마뉴스 왕은 절제없는 호화스러운 생활로 가산을 탕진하고 궁핍해졌는데

다시 비르지타가 궁으로 들어와 주기를 청하므로, 그녀는 궁중에 다시 들어가

우선 사치스러운 생활을 청산하고 착실한 생활을 택하도록 정성어린 간언을 했다.

그러나 왕은 그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궁중에 있는 사람들까지 그녀를 모욕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간언이나 그녀의 성스러운 생활 태도가

안일함만을 찾는 그들에게는 눈의 티와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비르지타는 모든 것을 달갑게 참아 받았다.

그러나 자기 권고가 무익됨을 알고는 오래지 않아 스웨덴에 큰 재화가 미칠 것을 예언하고

다시 알바스트라의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당시 교황은 로마가 아닌 프랑스의 아비뇽에 계실 때였다.

그것을 유감되이 생각한 비르지타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교황께 서한을 보내어 로마로 귀환할 것을 청했다.

한편,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도 역시 같은 청을 해 마침내 교황은 로마로 귀환케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비르지타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녀는 수많은 환시와 계시를 받았는데 고해 신부는 그녀의 모든 환시가 올바르다고 보증해 주었다.

그녀는 이러한 계시에 따라 1344년에 바드스테나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성삼회(비르지타회)의 시작이었다.

마뉴스 왕이 필요한 물자를 원조했고,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그 수도원을 인가했다.

 

1350년은 교황께서 은사를 공포한 해이다.

비르지타는 은사를 얻기 위해 꼭 로마를 순례하고 싶은 충동을 받았으나,

왜 그런지 쉽사리 떠나게 되지 않았다.

아마 장거리 여행을 하면 다시는 스웨덴을 볼 수 없을 것같이 느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후에 로마로 갔고,거기서 17년을 지내는 동안 온갖 덕행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로마에 머물면서 여러 수도회를 개혁하고 빈민구제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로마에 있는 동안 스웨덴을 위해 여러 가지 배려를 베풀었다.

그녀의 아들, 딸들도 어머니를 찾아 로마로 왔는데 그들 중의 하나가 스웨덴의 성녀 가타리나이다.

 

 

 

 

비르지타는 예수께서 생활하시던 곳과 돌아 가신곳을 보고 싶은 열망을 억제할 수 없어

팔레스티나 순례를 떠났다.

도중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겨우 성지에 도착해 감동된 마음으로

거룩한 장소들을 빠짐없이 참배했다.

그러나 성모께서 발현하셔서 돌아가라고 명령하셨으므로,

즉시 길을 떠나 돌아오는 도중 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가까스로 로마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때는 1373년 사순시기 무렵이었다.

비르지타는 2, 3개월 더 살았는데 이 짧은 기간에도 여러가지 유혹이 일어나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것은 그녀에게 있어 하느님께서 내리신 마지막 시련이었다.

 

7월 23일 아침, 성녀는 고복을 입고 판자위에 누워 그녀의 병실에서 거행되는 미사에서

노자 성체를 영하고 감사하는 마음에서 미사 한대에 더 참여해,

거양성체 때 소리를 높여 "주님!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하고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유해는 클라라 수녀회의 성당에 매장되었다가,

1년 후 스웨덴의 바드스테나 수도원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녀의 유해에서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으며, 1391년에 그녀는 시성의 영광을 받았다.

 

 

 

 

성녀 비르짓다의 예수님 수난 15기도

발행인: 하안토니오 | 출판사: 아베마리아 출판사 | 2003년 9월 15일

 

예수님께서 성녀 비르짓다를 통하여 계시하신 당신 수난에 대한 15기도.


"매일 주님의 기도 15번과 성모송 15번을 바치며 이 15기도를 1년 동안 바쳐라.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회개의 은총을 베풀어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