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연중 제15주일]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시는 하느님

수성구 2022. 7. 10. 04:10

[연중 제15주일]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시는 하느님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시는 하느님

신명 30,10-14; 콜로 1,15-20; 루카 10,25-37

연중 제15주일; 2022.7.10.; 이기우 신부

 

1. 말씀의 주제: 이웃 사랑으로 하느님을 드러내기

오늘 말씀의 주제는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시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 인간에게 무상으로 당신의 자비를 드러내주셨기 때문에 그 자비를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유다교 사제들이었던 사두가이들은 그 반대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직무를 맡은 그들이 속죄대행업자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직접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었던데다가, 이웃 사랑을 위해 쓰라고 바친 속죄의 헌금조차 자신들의 수입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들을 단죄하시고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고자 하셨습니다. 그 대신에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가 아니라 백성들 한가운데에서 그네들이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이 도움을 청할 때마다 하느님을 섬기는 정성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이웃 사랑을 위해 바치는 희생이 바로 제사라는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2. 사랑의 제사, 예수의 선교

살아계실 동안 이렇게 사람들 속에서 사랑의 제사를 바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나누신 최후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몸과 피로 여기시어 제물로 삼아 바치셨으며, 과연 당신의 죽음조차도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제사로 여기셨습니다(요한 17,1.13; 19,30). 이렇게 예수님의 모든 선교 활동이 그분의 제사였고, 또 그분께서 바치신 사랑의 제사가 곧 그분의 선교였습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던 이방인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3. 사랑을 벗어난 율법과 하느님 나라의 가르침

본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준 율법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의 뜻을 지키기 위한 길이었습니다(신명 30,10).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율법의 전문가로 자처하던 바리사이들은 본시 십계명으로 시작된 율법을 육백 가지도 넘게 늘려놓고 지키라고 강요했습니다. 이런 억압적 가르침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면서도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레위 19,18)은 제외시키고 있었습니다. 다분히 편이적인 이런 선택적 율법 준수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독자적으로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진복팔단과 산상설교의 가르침입니다(마태 5,3-10 및 5-7장). 사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처신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하느님의 계시를 드러낸 것이고,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콜로 1,15). 

 

4. 바리사이들과의 논쟁

 예수님께서는 이 가르침을 전하시기에 앞서 이미 다가온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백성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무수한 일을 하셨습니다. 눈먼 이를 보게 해 주셨고, 귀먼 이를 듣게 해 주셨으며, 말 못하는 벙어리가 말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셨으며, 중풍 병자를 걷게 해 주셨습니다. 자식 잃은 부모에게 자식을 살려서 돌려주셨으며, 마귀들린 이들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런 모든 일을 하신 다음에는 이를 비유로 풀이하셨는데, 이는 당신의 복음선포로 사람들이 겪은 하느님 나라 현실의 체험에 담긴 뜻을 깨우쳐주시기 위한 말씀의 직무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분의 이웃 사랑에 대해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곡해를 하는 것도 모자라서,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훼방을 놓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논쟁이 벌어졌고, 예수님께서도 이 논쟁마다 물러서지 않고 맞서셨습니다. 그리하여 안식일 논쟁, 계명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고, 급기야 이웃 논쟁으로까지 번졌습니다. 

 

5. 논쟁이 발전한 경위 

예수님께서는 그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던 바리사이들의 안식일 계명 해석과 달리 안식일에도 아니 안식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며 실제로 그렇게 하셨는데, 그분이 하느님의 계명을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바리사이들이 했기 때문에 안식일 논쟁이 계명 논쟁으로 번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첫째가는 계명으로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떠 보았고, 그분은 그들이 떠받들던 하느님 사랑의 계명뿐만 아니라 그들이 소홀히 하고 있던 이웃 사랑의 계명을 상기시키시며 이 두 가지가 다 첫째가는 계명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 중에서 도움이나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필요한 사랑을 베푸셨을 뿐만 아니라 시로나 티로 등 해안 지방이나 데카폴리스 같은 내륙 지방의 이방인들을 찾아가시면서까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도움을 마치 하느님을 섬기는 정성으로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 마음에 하느님을 섬기려는 믿음이 생기면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사이들은 물러서지 않고 그렇다면 누가 우리의 이웃이냐며 또 따지듯이 물어왔고, 그래서 오늘 복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6.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웃 사랑

예수님께서 예화로 드신 이야기를 보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사제도, 레위인도 보고서 모른 척 하고 지나가버렸지만, 그 사람을 동족처럼 돌보아준 사람은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여행을 하다가 마주친 그 낯선 유다인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응급조치를 했습니다. 우선 상처에 감염을 막아주는 올리브 기름을 발라주고 싸맨 다음,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마취용 포도주까지 마시게 하고 나서,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그는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상처받은 유다인을 돌보아달라고 부탁까지 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야말로 그 사마리아 사람은 그 죽어가던 유다인을 진정성 있게 도와준 것입니다. 

 

7. 유다인의 위선, 사마리아인의 진정성

전형적인 유다인 두 사람을 예로 드심으로써,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하면서도 자비를 거절하던  율법 교사의 위선을 예수님께서 폭로하신 이 하나의 이야기로 논쟁은 간단히 끝났습니다. 실상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에 빗대어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다와 사마리아 사이에 내려오던 해묵은 지역감정은 물론, 유다와 갈릴래아 사이의 뿌리 깊은 지역감정도 넘어서는 이웃 사랑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이스라엘 안에서만이 아니라 땅 끝까지 퍼져나가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만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도 그분은 착한 사마리아인이셨던 겁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제 민족과 인류를 위한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할 부르심이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 부르심은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사랑이 바로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요 제사여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8.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옛날부터 한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이 뛰어났고 이 종교적 심성으로 높은 문화를 이룩했다고 말을 하지만, 서구로부터 산업화된 문물과 함께 물신을 숭배하는 풍습과 유물적 사조도 함께 들어온 현대에 들어서서는 한국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종교 무관심 내지 반종교적 감정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뒤늦은 산업화를 따라잡겠다고 열심히 서구화를 배우는 동안에 어느 덧 무신론 사조가 묻어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다수 한국인들이 실천적으로 무신론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신론의 형태는 명목상으로 불가지론(不可知論) · 공산주의(共産主義) · 과학주의(科學主義) · 인문주의(人文主義) 등 다양하지만 이런 명목 없이도 부지불식간에 우리 사회의 무신론적인 사상풍조에 휘둘려서 종교 무관심 내지 반종교적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들이 가장 많습니다. 이는 현상적으로 관찰할 때, 최근 한국 사회에서 사이비 종교들이 범람하고 있기도 하고 일부 기성 종교의 지도자들이 보여준 일그러진 모습 때문이기도 합니다(지역사목의안, 26-27항). 

 

  더욱 근본적으로 살펴보자면, 공산주의와 같은 집단적이고 체계적인 무신론은 유럽에서 산업혁명으로 가난한 노동자들이 급격하게 그것도 대량으로 늘어나는 바람에 빈익빈부익부의 사회악 현상이 생겨났는데도 교회가 가난한 노동자들을 도외시한 데서 비롯되었고, 과학주의적 무신론이나 인문주의적 무신론 역시 일부는 성서에 대한 오해와 무지로부터 비롯되기도 했고, 또 일부는 과거 중세와 근세 유럽에서 교황청이 과학적 성과나 인문적 성찰을 탄압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믿는 이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실천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아무리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무신론자로 자처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이 보여주는 무신론 경향이 사실은 가장 간절하게 하느님의 진리를 찾고 하느님의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의 소리라는 사실을 눈치채야 합니다. 그래서 무신론을 시정하는 길은 오로지 올바로 해석된 교리와 신자들의 사랑 실천뿐(사목헌장, 21항)이라는 공의회의 메시지는 참으로 옳은 예언자의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무신론 세력에 의해 점령된 현대 한국 사회에서 갇혀 있는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을 이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착한 사마리아인’으로서 이웃과 사랑을 나누고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는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의 표양입니다(교리교육 의안, 20항). 이것이 무신론 사조의 원인에 따른 대책으로서 이웃 사랑으로 하느님을 드러내는, 예수님의 선교를 계승하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