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밝은 데서 말하고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수성구 2022. 7. 9. 06:31

밝은 데서 말하고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이사 6,1-8; 마태 10,24-33 /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2022.7.9.; 이기우 신부

 

  이사야는 우상숭배 풍조가 만연한 남유다왕국에서 예언활동을 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살피지 않는 임금이 백성들의 살림살이도 제대로 돌보지 않아서 백성들마저 각자도생으로 우상숭배 풍조에 물들어가던 상황에서 자처한 예언자 노릇이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ㄴㄹ).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도라고 부르시며 당신도 박해받을 것이니 사도들도 박해 받을 것을 각오하라고, 그런데 박해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그들은 육신을 죽여도 영혼은 손도 대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러시면서 당신께서 어두운 데서 말한 것을 밝은 데에서 말하라고 하셨으며,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사야처럼 능동적으로, 또한 당신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로 하느님을 증거하라고 분부하신 것입니다. 

 

  통상 교회에서 하느님에 대해 증거하는 일은 교리교육과 강론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 신앙선조들은 초창기부터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의미를 깨치고 인생의 행로를 밝히는 한편 나라와 민족이 나아갈 길에 대해 탐구하고자 함께 모여 교리를 연구했었습니다. 그것이 천진암 강학회였고 ‘가성직자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는 이 땅의 평신도 신앙선조들이 보여준 진리 탐구의 열성을 계승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배경 겸 결과가 이러합니다. 

 

  한국인들이 일찍이 찬란한 문화를 반만년 동안 꽃피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역사의 초창기부터 계시된 하느님의 선함을 배우고 떠받들고자 했던 종교적 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에 이르러서는 거듭되는 혼란과 분열과 전쟁으로 인해 후손에게 이어 줄 전통과 가치관을 확고하게 다지지 못했습니다. 또한 외국의 문물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가치관이 뒤틀렸고, 서구적 물질 만능주의 풍조에 물들어버려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채로 커다란 진통을 앓고 있습니다. 물론 민간과 군부의 독재자들이 억압하고 착취하던 시절에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누리기 위한 줄기찬 노력을 하기도 했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인권 유린, 부조리, 불의 등을 일삼음으로써 하느님의 정의에 상반된 길을 가고 있습니다(사목회의 교리교육 의안, 3항)

 

  사회 현실이 이런데도 우리 교회는 한국인의 전통과 종교적 심성을 십분 반영하여 하느님을 전하지 못하고 서구 교회에서 전해 준 신학적 명제의 요약과 같은 메마른 교리를 주입시키는 일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체험한 하느님은 살아서 숨쉬는 듯한데 비해서 우리 교회의 교리에서는 살이 비쩍 마르고 피가 통하지 않아 뼈다귀만 남은 앙상한 하느님을 전하는 듯합니다. 한국인이 근세 이래 겪은 공통의 체험을 해석한 언어로 정통 교리를 설명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이 체험을 작품으로 만든 문화영화인들이 전 세계적으로 공감을 받고 있는 한류를 일으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역사와 문화 현상 속에 담긴 신성의 징표에 대한 귀머거리에 장님에, 반벙어리에 앉은뱅이처럼 요지부동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일학교에 나오는 청소년들은 또 다른 학원 수업을 받듯이 교리를 배우는 바람에 학년이 올라갈수록 출석인원이 줄어들기 마련이고, 예비자 교리에 출석한 예비자들은 아무런 성찰이나 회개의 과정 없이도 주어진 기간만 되면 자동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기대합니다. 도무지 하느님 체험을 성찰할 자극도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요식행위로 정화의식을 치르고 선발의식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입교하여 영세한 새 신자들도 주일날에 성당에 가서는 신자로서 처신하는 법과 아울러 성당 문만 나서면 도로 영세 이전의 처신으로 돌아가는 법을 함께 터득하는 중입니다. 이런 이중적 처신으로는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도 박해 받을 일이 없고, 우리 선조들처럼 자발적인 열성으로 탐구할 기회도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사야처럼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우보다는 오히려 소극적으로 기피하는 경우가 미덕인 것처럼 변질되었습니다(교리교육 의안, 6항)

 

 그래서 우리 교회가 살아나려면 첫째, 은둔주의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물게 가혹했던 백여 년 동안의 박해를 겪으면서 이 땅의 가톨릭 신자들은 어느덧 은둔주의적 자세가 몸에 배여서 복음 전파도 소극적으로 하려고 하는 타성이 생겨났습니다. 둘째, 평신도들을 깨어나게 하기 위해서도 먼저 성직자들이 권위주의적 의식을 버리고 교리교육이나 강론을 고답적으로 하는 대신에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을 들려주고 바람직한 복음선포 자세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특히나 신앙 선조들이 보여주었던 토착화 노력을 본받아서,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여 알려주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사회적 현상이나 사상적 풍조로 나타나고 있는 구조적 징표를 식별해 주는 진정성 있는 말씀 봉사를 선보여야 합니다. 셋째,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분리하여 살아가는 이중적 태도를 고쳐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이전 시대 유다인들이 보여준 전형적인 우상숭배 태도입니다(교리교육 의안, 14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