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연중 제14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수성구 2022. 7. 3. 06:07

연중 제14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14주일: 다해

복음: 루카 10,1-12.17-20: 일흔 두 제자의 파견

 

오늘은 기쁨이라는 것이 고통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귀양살이 후에 예루살렘의 중흥에 대한 이사야 예언자의 기쁜 소식을 듣게 되고,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구원의 사명을 위해 파견하시지만 우선 기쁨보다는 고통을 예고하신다. 마치 “이리떼 가운데 있는 어린양”(3절)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선교사명을 마쳤을 때 기쁨의 환호성이 나오고, 예수께서는 흥분한 제자들을 진정시키신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20절). 아마 그 기쁨은 복음이 전하는 사람에게나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발과 낙담과 위기 그리고 회피와 실망의 감정이 일게 된다.

 

“그 때에 주님께서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보내셨다.”(1절). 예수께서는 복음을 전하시기 위하여 열두제자를 파견하셨다고 모든 복음에서 전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열두제자들만이 아니라, 더 많은 협력자와 소실전달자들이 있어야 함을 보여주신다. 72라는 숫자는 전승에 의하면 세계에 흩어진 이방인들의 나라 숫자가 그만큼 된다고 한다(창세 10장 참조). 바로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2절). 추수는 하느님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다(요엘 4,13 참조). 이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종말론적 사업에 당신의 제자들을 결합하시는 모습이다. 즉 주님뿐 아니라 제자들도 종말을 선포한다는 것이다. 이제 제자들은 스승과 같은 사명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도가 필요하다. 추수의 주인이신 하느님만이 그 복음 선포자들을 세워주실 수 있고 필요한 힘으로 무장시켜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선교라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3절). 그를 파견하신 분이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결과는 뻔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안전대책을 마련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철저히 그것을 거절하라고 하신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그런데 복음선포의 여정을 걸으며 살아가는데 인간적 도구의 부족은 아무런 두려움을 주지 못한다. 그 복음 선포자들은 이미 가난을 근본적으로 선택하였고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하기 때문에, 이리떼 가운데서 지켜주실 수 있는 그분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 누구를 통해서 매일 양식도 마련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7절).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예로 들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보물(사도직)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7-10). 이러한 삶이 진정 다른 사람들에게 평화(shalôm)를 전해줄 수 있다. 이 평화는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다. 즉 하느님 나라의 능력과 힘의 표지이며, 인류에게 주는 생명과 쇄신의 표지이다. 루카는 평화를 선교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리떼 가운데 어린양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전해야 하기에 평화의 건설자이다. 항상 평화를 기원해주며 순교자의 삶으로 그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제자들은 기쁨에 넘쳐 돌아와 그간의 활동을 스승님께 보고하고 있다. 제자들이 주님께 보고하는 것은 전교활동의 성공에 대한 자만심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 악령들까지도 쫓아내시며 보여주신 능력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하늘의 영광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신다.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17-20절).

성공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교만해질 수 있는 유혹이 될 수 있다. 사탄을 하늘에서 떨어뜨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참조: 이사 14,12; 묵시 12,8). 이렇게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은 오직 공동 이익(1코린 12,7)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그 기쁨은 하느님께 다시 영광을 돌리며 느끼는 더 큰 기쁨이기 때문에 이 기쁨 역시 전교의 영역에 드는 것이다.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은 선교이다. 그래서 교회와 일치하고 있는 우리 모든 신앙인은 선교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다. 세례로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는 모두 이리떼 가운데 어린양으로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세를 언제나 견지할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