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 가치에 목마른 세상

수성구 2022. 7. 1. 04:26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 가치에 목마른 세상

 

아모 8,4-12; 마태 9,9-13 /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2022.7.1.;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는 아모스가 예언자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게 된 자리가 과연 어디였는지를 매우 사실적으로 알려줍니다. 바로 가난한 이들을 차별하고 착취하며 부정부패가 만연한 사회현실입니다.  아모스가 “양 떼를 몰고 가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었다”던 평온한 일상 뒤에는 저울 눈금을 속여 파는 짓도 모자라서 힘 없는 가난한 이들을 헐값에 사고 파는 인신매매까지 할 정도로 사람들의 양심이 마비되어 버린 현실이 숨어 있었습니다. 사람들 마음 안에서 양심의 목소리가 사라진 현실에 대해 분개했던 아모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기원 전 7세기경에 그가 활약했었음을 감안하면 지금으로부터 무려 2천 7백 년 전의 상황인데도 오늘날의 상황을 고발하는 듯한 현실감과 기시감(旣視感)을 느낍니다. 

 

  아모스 당시에는 북이스라엘 왕국을 비롯하여 다마스쿠스(1,2), 가자(1,6-8), 티로(1,9-10), 에돔(1,11-12), 암몬(1,13-15), 모압(2,1-3), 유다(2,4-5), 이스라엘(2,6-16), 특히 사마리아(2,9-15) 등 그 주변 모든 민족들의 행태가 겉치레뿐인 예배로 우상숭배 일색이었습니다(아모 4,4-5). 우상을 숭배하면 하느님의 최고선에 대해 알지 못하게 되어서 공동선도 망가집니다. 그 피해는 가장 힘이 없는 가난한 이들이 가장 크게 입게 됩니다. 그래서 정의가 사라지면 가난한 이들이 울부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공정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5,24)고 외쳤습니다. 

 

  17세기 유럽에서 인류가 동력을 발명하여 노동생산성이 올라가자 가난한 이들에게도 부를 더 많이 나누어줄 수 있게 된 산업혁명 시대에 양심의 소리를 잊어버린 자본가들은 정반대로 행동했습니다. 동력기계를 도시에 더 많이 배치하여 수익을 더 올리려고 했고, 농사짓던 땅에도 공장을 세워 농부들까지도 노동자로 고용하여 수익을 극대화시키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 생산된 제품이 남아돌자 시장을 개척하기 위하여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가난한 어린이들과 부녀자들도 장시간 노동에 종사해야 했고 그래봤자 저임금에 시달려 겨우 연명하던 시절입니다. 

이렇듯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1848년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선언한 <공산당 선언>이 나오고, 1867년에는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을 파헤친 「자본론」까지 출간되자 노동자 운동이 전 유럽을 휩쓸었고 자본가 편을 드는 교회를 떠나는 노동자 신자들이 속출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징표가 뚜렷해지고 나서야 1891년에 부자를 더 부유하게 만드는 대신에 가난한 이들은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 사태와 이를 초래한 모든 경제적 불의에 분노하는 교황청의 응답이 나왔습니다. 레오 13세 교황이 반포한 최초의 사회회칙인 「새로운 사태」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 장면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동향에 대해서 두뇌회전이 빠르고 셈도 빨라서 세리라는 직업을 택해서 남부럽지 않게 돈을 벌 수 있었던 그가 예수님을 만난 장면을 소개합니다. 보자마자 그를 부르신 예수님이나, 부르심 한 마디에 그분을 따른 마태오를 보면, 이미 두 사람 사이에는 드러나지 않게 교감한 만남이 여러 차례 있었던 듯합니다. 가시는 곳마다 군중이 몰려들고 그들에게 고상한 진리를 선포하시며 아픈 사람 고쳐주시고 마귀들린 사람 해방시켜주시던 예수님을 마태오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먼 발치에서 바라본 예수님의 거룩한 기운을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 마태오의 마음 한 구석에 있던 양심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을 것 같습니다. 남 부러울 것 없었던 세리 생활에서 영 채워지지 않았던 거룩함의 그 무엇인가를 문득 갈망하게 되었던 차에, 멀리서 이런 마태오의 표정과 눈빛을 읽으신 예수님께서 주저없이 그를 제자로 삼으시고자 부르셨을 것입니다. 마태오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나설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죠셉 까르뎅은 벨기에에서 신학생 시절 회칙 「새로운 사태」를 읽고 1906년에 사제로 서품되어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키는 노동자 운동에 대항하는 가톨릭 노동청년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이 첫 회칙이 반포되고 나서도 경제적 부조리가 나아지지 않자 비오 11세는 아모스 예언자를 방불케 하는 더 강경한 어조로 「사십주년」 회칙을 반포하여 가톨릭 액션 운동을 제창하였습니다. 이에 호응한 스페인의 호세 마리아는 바스크족 출신으로서 극우 프랑코 총통이 교황이 반포한 사회회칙에도 거스르는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것에 분개하여 스페인 북부 몬드라곤에서 1956년에 협동조합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사태」 회칙을 반포한 레오 13세와 「사십주년」 회칙을 반포한 비오 11세가 현대판 아모스 예언자를 연상시킨다면, 가톨릭 노동청년 운동을 일으킨 죠셉 까르뎅 추기경과 협동조합 운동을 개척한 호세 마리아 신부는 현대판 마태오를 닮았습니다. 그들의 성소는 경제적 불의가 일으키는 불평등 현실에서 현대판 우상숭배를 보았고, 사람들이 자본가든 노동자든 하느님 말씀에서 나오는 정의와 평등의 가치에 굶주리고 목마른 원인을 깨우쳤으며, 따라서 이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새로운 가톨릭 운동을 사회적으로 일으켰다는 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자신들이 부유하고자 백성을 착취하면서도 거룩한 척 위선적인 행태를 보이던 고대판 자본가들이 바리사이들이었는데, 이들이 조장하던 사회적 불의와 경제적 불평등이 만연한 현실에서 거룩한 분노를 느끼고 하느님의 말씀과 가치를 찾게 된 많은 이들의 원조, 그가 마태오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에 굶주리지 마시기바랍니다. 말씀이 일러주는 양심의 가치에도 목말라하지도 마시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