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수성구 2022. 6. 30. 04:54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아모 7,10-17; 마태 9,1-8 /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2022.6.30.; 이기우 신부

 

  어제 교회가 거행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의 기념일이 여느 사도들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대축일로 정해져 있는 이유는 그 두 사도가 초대교회의 대표이기도 하지만,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어도 복음선포에 헌신한 이름없는 다른 사도들과 신자들을 대신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한 두 사람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없는 법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중풍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중풍의 치유에 앞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이를 지켜보던 율법 학자들로부터는,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하는 신성모독의 혐의를 받으시게 되었고, 끝내 십자가 죽음에 이르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확인하거나 추정되는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알 수 있습니다. 확인되는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다른 예언자들과 달리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신성을 지니셨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추정되는 사실은 예수님의 눈으로는 사람이 중풍에 걸리는 되는 원인이 중풍이라는 병의 바이러스가 있어서가 아니라 면역력을 손상당할 만큼 심한 스트레스를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받았기 때문이므로, 그가 받았던 억압과 소외 이상으로 존중받고 받아들여지는 수락과 환대의 체험이 필요하며 그렇게 해서 그의 자연적인 면역력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죄는 행위로만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고 소외되는 체험 내지 현상도 의미합니다. 그 중풍병자는 죄의 행위를 저지른 범죄자가 아니라 죄의 처지를 당한 피해자일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또한 그렇게 해서 중풍에서 치유된 그 사람은 이후 누구못지 않게 열렬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게 되었으리라는 점도 어렵지 않게 추정되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제법 많았기에, 열두 제자를 위시한 일흔 두 제자, 그리고 성모 마리아와 여인들 말고도 모두 백스무 명이나 함께 성령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사도 1,15). 익명의 사도들의 존재와 활약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지극히 이례적인 초대교회의 공동체적 활력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늘 독서는 평범한 사람이 하느님께 사로잡히게 되는 경위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모스는 본시 남유다 땅에 살던 농부였습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궁정 예언자 아마츠야가 아모스에게 한 발언이 그 근거입니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아모 7,12). 그리고 덧붙여 알 수 있게 되는 점은, 아마츠야 같은 궁정 예언자들은 직업적인 예언자로서 그들의 예언 활동으로 밥을 벌어먹었다는 점입니다. 그에 비해 아모스는 재야 출신 예언자였으며, 자신의 생업으로는 돌무화과나무를 키우는 농업과 양 떼를 돌보는 목축업이 있었고 예언 활동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했던 것이었습니다. 

 

  아모스는 자신의 예언자 성소에 대해 이렇게 밝혔습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하고 말씀하셧다”(아모 7,15). 이것이 오늘날 교회 현실에 비추어 해석하자면 평신도 사도직 성소입니다. 

 

  자신의 가정과 직업을 포기하고 오로지 예수님만 따르던 제자들과 여인들이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되었지만, 초대교회에는 이들을 제외하고도 백스무 명에 속하는 익명의 사도들이 존재했습니다. 중풍을 앓고 있다가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혐의를 뒤집어쓰실 각오를 하면서까지 자신을 치유해 주신 예수님 덕분에,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오늘 복음의 그 사람도 익명의 사도가 되었을 공산이 큽니다. 중풍을 고쳐주시고 자존심과 명예를 되살려주셨는데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무릇 믿음은 체험에 정확히 정비례하는 법입니다. 투신의 강도와 헌신성도 믿음의 크기에 비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삶을 보면 그가 지닌 믿음과 그가 겪은 체험의 크기 또한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이런 체험을 하고 나면, 하느님의 신적 능력으로 치유의 기적을 얻어 누렸음을 깨닫게 되고, 따라서 아모스처럼 ‘하느님께 사로 잡혔다’라든가 ‘하느님께서 부르셨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성모독의 혐의를 둔 바리사이와는 정반대의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복음에서 확인된 사실과 추정되는 사실에 비추어 아모스의 소명 체험을 알아듣자면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이 그 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복음서의 기록에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체험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 아들이나 딸이 죽었거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부모, 죽을 병에 걸린 유다인 하인을 되살려주신 은혜에 감복한 로마인 백인대장, 역시 아들이 죽을 뻔 했다가 되살아난 헤로데 왕실 관리, 예리코에서 눈을 뜬 바르톨로메오, 예루살렘에서 38년 동안이나 앉은배이로 살다가 걷게 된 사람 등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삶의 방향을 바꾸어서 초대교회에서 익명의 사도가 되었을 사정을 공통적으로 지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고 당부하셨기에 오늘날에 성경으로 남아 있는 기록을 남기신 사도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기보다는 실행하는 데 더욱 힘쓴 사도들이 더 많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처럼 조화와 균형으로 신앙을 살아있게 만든 여러 역사적 인물의 사례를 어제 상기했습니다만, 그들의 이름 뒤에는 훨씬 더 많은 숫자의 인물들이 익명성으로 병풍처럼 둘러 서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벽 뒤에는 적어도 열 명 이상의 강학회 출신 선비들이 있고, 김대건의 뒤에는 적어도 만 명 이상의 순교자들이 있으며 최양업의 뒤에는 그 몇 십 배의나 더 많은 교우촌 증거자들이 있습니다. 정약용과 안중근, 장면과 김수환의 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우 여러분! 세상의 역사에서는 1등만 기억하는 버릇이 있지만, 하느님의 역사에서는 믿음과 헌신으로 하느님을 증거한 모든 이들의 이름이 빠짐없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필리 4,3; 묵시 17,8; 참조: 마태 1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