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회의 주춧돌 사도, 그 조화와 균형

수성구 2022. 6. 29. 05:08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회의 주춧돌 사도, 그 조화와 균형

베드로와 바오로, 교회의 주춧돌 사도

사도 3,1-10; 갈라 1,11-20; 요한 21,15-1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2022.6.29.; 이기우 신부

 

  베드로는 신앙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증거의 표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드님이시고 그분을 가장 닮으신 분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지니신 분임을 알게 되었고, 바오로의 신앙증거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닮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새로운 성령의 피조물로서 살아가야 함을 깨우쳐주었습니다. 후대의 사도직을 위해서 실로 절묘한 조화와 균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두 사도 본인들이 의도한 결과가 아니요, 예수님께서 개입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본인들의 노력에다가 성령께서 이끄신 섭리적 안배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로써 후대의 사도들과 교황들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일관성있게 계승하면서도, 바오로의 신앙증거처럼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다양한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은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나타난 이러한 섭리적 역사가 한국교회의 초대와 근현대 역사에도 이어졌습니다. 

 

  한국교회는 진리를 추구하던 유학자들이 복음을 들여와서 세운 후에,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에 저항하며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이 성장시킨 교회라는 점에서 전 세계 교회사 안에서도 독특하고 모범적인 사례입니다. 이벽을 비롯한 평신도 선비들이 주춧돌을 놓았고,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순교자들과 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증거자들이 박해 속에서도 교회를 지키고 성장시켰습니다. 

 

  이 같이 쌍두마차처럼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진리를 살아있게 만든 역사의 섭리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으니, 정약용과 안중근, 장면과 김수환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정약용은 느닷없이 조상제사금지령을 내린 북경 주교와 교황청의 조치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여 배교자로 취급되었지만 천진암 강학회와 그 후 가성직자단의 중추적 인물로 활약했던 죄과(?) 때문에 18년 동안이나 전라도 강진 땅에 유배되어야 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천진암 강학회에서 이벽으로부터 천주학의 세례를 받은 선비로서, 가톨릭 지성인의 선구자적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그는 유배를 당했지만 역설적으로 정적들의 모함에서 더 이상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던 덕분에 그가 알고 있던 유학 경전을 모조리 천주학의 기준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주자를 넘어섰습니다. 비록 사돈지간이요 불과 여덟 살 연상이었던 이벽의 가르침을 스승으로 삼아서 유배지에서 그가 남긴 저술이 500여 권에 이르는 여유당 전서입니다. 그는 오늘날 한민족 최대의 학자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박해가 종식된 후 부친을 따라 천주교 서적 120권을 읽고 나서 천주교 신자가 된 안중근은 선교사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서 당시 뮈텔 주교로부터 황해도 전교활동이 전국 으뜸이라는 인정을 받기도 했지만 일제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나타나자 교육 사업을 거쳐 항일운동에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극동평화론’이라는 침략 이데올로기로 위장하며 조선을 침략하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주살(誅殺)하였습니다. 그가 옥중에서 남긴 동양평화론은 그가 왜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사람을 죽여야 했는지를 웅변하는 고백록인데, 이에 따르면, 그는 하느님 사랑으로 겨레 사랑을 행동으로 증거한 순교자입니다. 정약용처럼 그도 교회 내부에서보다 민족 전체, 아니 한중일 삼국과 북한에서도 추앙받고 있는 대표적 아이콘입니다. 이렇게 한국교회의 근대사에서 정약용은 학문으로, 안중근은 행동으로 신앙을 증거한 덕분에 한국 가톨릭교회가 한민족사의 주류로 떠오를 수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당시 교황 비오 12세의 전폭적인 외교적 지원과 한국 교계의 성원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유엔 승인과 6 25 전쟁 당시 유엔 회원국들의 참전을 이끌어내는 외교활동을 펼치고, 무엇보다도 제헌 국회의원으로서 백년 박해를 견디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천주교의 윤리적 가치를 대한민국 헌법에 관철시킨 장면이 있습니다. 제헌 헌법이 현행 헌법보다도 더 진보적일 수 이었던 배경에는 그가 신앙과 정치를 하나로 하되 둘 다 철저하고 깨끗하게 증거한 덕분입니다. 

 

  그런가 하면 헌법에만 규정되었던 민주적 가치를 실제 정치 현실에서도 지켜내려던 민주시민들을 옹호하면서 정치의 현실에 신앙의 진리를 증거한 인물은 김수환입니다. 그가 근 30여 년의 서울교구장직을 내려놓았을 때나, 그 10년 후 선종했을 때 천주교 신자들을 제외하고도 그를 문상하던 수십 만의 인파를 비롯하여 전 국민의 애도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국 민주화에 대한 그의 공로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가 보여준 보편 초대교회 역사에서처럼, 한국교회의 초대와 근현대  역사에서도 이벽을 비롯한 평신도 선비들과 김대건과 최양업 등의 사제들, 정약용의 학문과 안중근의 행동, 장면의 신앙적 정치와 김수환의 실천적 신앙 등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지금의 한국교회를 있게 하였습니다. 한반도 평화와 민족 복음화 그리고 아시아 복음화 등 우리에게 남은 파스카 과업에도 같은 섭리적 은총을 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