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기억과 희망의 지킴이가 되어야 할 파스카 시대

수성구 2022. 6. 28. 01:49

기억과 희망의 지킴이가 되어야 할 파스카 시대

아모 3,1-8; 4,11-12; 마태 8,23-27 /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2022.6.28

 

  어떤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이 또 다른 이들에게는 부당한 일이기도 합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로 살아가던 아모스에게는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느님을 모르는 척 하는 행태가 결코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그 막강하다던 이집트 군대의 손아귀에서 빼내어주셨고, 그 깊은 홍해를 말리어 마른 발로 건너게 해주셨으며, 마실 것도 먹을 것도 귀한 시나이 광야에서 바위에서 물이 샘솟게 하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셔서 살게 해주셨으며,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내려주시어 바른 길을 걷게 인도해 주셨는데도,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 기적들로 이루어진 역사와 이를 주관하신 하느님의 섭리와 모세가 공리처럼 가르쳐 준 율법을 모른 척하고 우상을 섬기며 제멋대로 살아가는 행태가 아모스에게는 너무나 부당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남유다 출신에다 평신도이자 농부의 신분이면서도 감히 북이스라엘 왕국의 왕과 궁정 예언자들을 향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성을 향해 예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단순 명료했습니다. 이제 우상숭배를 맘추고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아 대망 사상의 단초가 된 이 예언은, 두 쪽으로 분열된 왕국 모두에서 하느님 백성으로 선택된 자들이 보여주는 우상숭배 행태가 도를 넘어섰으니, 이제 하느님께서 몸소 오셔서 당신 백성이 나아갈 길을 가르치고 보여주실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이므로 그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바빌론 유배라는 또 다른 시련을 호되게 겪고 나서도 막상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상황은 이미 오신 메시아를 막아서고 감추며 대적하려는 마귀의 풍랑이 매우 거세게 불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마귀를 쫓아내느라 공생활 내내 동분서주하셔야 했고, 갈릴래아 호수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다녀야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날도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는데, 제자들은 겁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런데 복음선포 활동으로 몹시 피곤하여 깊이 잠드셨던 예수님께서 깨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자 풍랑이 잦아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제자들도 꾸짖으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과학만능의 가치관에 젖은 무신론자들의 눈에는 말씀 한 마디로 풍랑을 잠재우고, 더군다나 풍랑 때문에 겁에 질려있는 애꿎은 제자들까지 믿음이 약하다고 꾸짖는 예수님의 이 언동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일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아시리아의 우상숭배 풍조를 들여와서 왕국의 공동선은 물론 최고선까지도 어지럽히던 왕과 궁정 예언자의 눈에 시골 농부에 불고한 주제에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호통치듯 외치던 아모스의 언동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일과도 비슷합니다. 자연현상을 말씀이, 그리고 권세가들의 노회한 관행을 믿음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일까요? 

 

  2014년에 한국을 찾아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자유주의라는 시대사조의 풍랑이 강하게 불어와서 매우 세속화되고 물질주의적인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21세기 초의 한국에서 능률적이며 중산층 위주의 잘 나가는 교회를 이끌고 있는 한국 주교단에 대해서 마치 예언자 아모스처럼 매우 강한 어조로 발언하였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형제 사제들에게 권고합니다. 세속화와 능률화의 온갖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사랑의 이중 계명을 지키려고 목숨까지 바쳤던 순교자들에 대한 기억의 지킴이가 되고, 그 순교자들이 증거했던 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복음 진리에 대한 희망의 지킴이가 되십시오. 성령을 질식시키고, 회개를 무사안일로 대체하며, 마침내 모든 선교 열정을 소멸시켜 버리는 그러한 정신적 사목적 세속성에서 하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 빕니다.” 

 

  한국 교회에 건넨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 충정어린 권고가 넘실거리는 세속화와 능률화의 풍랑을 과연 잠재울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일까요? 겁이 많고 믿음이 약했던 제자들처럼, 그래서 방한 후 8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응답도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지 않고 그들을 우리 주위로 불러 모으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과연 이 정도로 교황권고에 걸맞는 응답이 될 수 있을까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200주년 사목회의에서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기초 공동체를 시행하자고 제안했지만, 막상 실행 단계에서는 교황 방한 이후 교회에 밀려들어온 중산층 신자들의 거부감을 배려하여 ‘소공동체’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행된 소공동체 운동이 30년 넘게 전국에서 전개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풍랑을 만나 겁에 질린 제자들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대목입니다.

 

  교우 여러분!

믿음이 필요합니다. 신앙 진리에 대한 순교의 기억과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교회라는 희망이 우리 교회를 지켜주리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추구했던 평신도들의 구도정신이 한국교회를 자생적으로 설립했다는 기억, 선교사들이 전해준 그리스도 신앙을 탐구하여 순한글교리서를 만들어 박해에 저항했던 기억이 지금의 우리 한국교회에 자발성과 지성적 노력을 촉구합니다. 더군다나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교우촌의 기억은 그로써 성령께서 함께 했던 기억으로 우리를 북녘의 가난한 이들과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사명과 희망으로 우리 한국교회를 재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