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가면서

화해, 그리고 일치 - 황성호 신부

수성구 2022. 6. 28. 02:32

화해, 그리고 일치 - 황성호 신부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주관으로 자전거를 타고 1사단 남방한계선을 순례하고 있는 DMZ 평화의 길 순례단.
왼쪽으로 분단의 아픈 상징인 철책선이 보인다.

 

화해 그리고 일치-황성호 신부

 

     

 

상처는 덮어 놓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덧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상처를 덮어 놓는다.

보여 주기 싫고 창피해서, 싫어할 것 같아서 등의 이유를 대며 감춘다.

 

그러다 상처가 덧나서 가래로 막을 것을

호미로 막아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상처를 감추려는 선택은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고통의 여정을 감내하게 한다.

 

상처는 고통을 수반하여 기쁨과 희망의 삶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된다.

그 상처가 어떤 공동체나 집단 그리고 한 나라의 상처라면

엄청난 중압감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어떤 상처일지라도 드러내서 철저하게 치료해야 한다.

왜냐하면 감추어진 상처는 우리 삶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6·25전쟁 72주기가 다가온다.

전쟁의 아픔과 슬픔은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한 반성과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내외적인 모든 상처들을

치유하는 화해(和解)의 과정도 필요하다.

 

이 과정이 없다면, 어떤 반성과 준비도 의미 없고,

전쟁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의 잔인함은 계속될 것이다.

서로 용서하기 위한 화해의 시작은 만남이다.

만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시작될 수 없는 것처럼

화해의 시작은 서로 만나는 것이다.

 

화해의 장을 열어 서로 만나 의견을 나누고 경청하고 토론해야 한다.

화해의 장에는 어떤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개입은 없다.

 

화해는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기 위해 품어주는 과정이지

또 다른 싸움을 시작하기 위한 정치와 이념이 아니다.

 

아이들이 서로 싸울 때, 씩씩거리고 얼굴까지 빨개져

어떤 말도 듣지 않고 달려들지만, 금방 서로 잘못했다고 먼저 손을 내민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라고 말하며 험악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곧이어 손잡고 함께 놀고 밥을 먹는다.

 

왜냐하면 화해에는 어떤 정치나 이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6·25전쟁의 상처는 너무 깊다.

지금도 어느 한쪽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이고 이념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화해를 위한 만남이 더욱 간절하다.

정부는 물론 일반 시민들도 만남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노력은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 일치로 이어지고,

이 일치는 급변하는 세상에서 하나가 되어 서로 공존하려는 기반이 될 것이다.
천주교광주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는 북한 이탈 주민들을 위한 정착 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

 

북한 이탈 주민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면서,

매일 저녁 9시에 광주·전남의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함께 기도를 바친다.

 

전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이 기도는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과 함께 화해와 일치를 이루도록 열려 있다.

우리 지역에서도 이러한 노력은 이어진다.

지난 6월 7일 남구청 주최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올레길 걷기 발대식이 있었다.

그리고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면서 매월 둘째 주 금요일마다

남구 관내 통일 올레길 걷기를 진행한다.

 

광주하나센터는 민족화해위원회와 함께 북한 이탈 주민들의 정착을 돕고 있다.

삶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했고,

이때 겪었던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이해하고 동반하고 있다.

 

화해의 시작은 만남이다.

바라만 보고 있다고 해서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렵더라도 공감하기 위해 만나고 경청하고 어머니의 가슴으로 품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우리는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상처투성이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 만나서 화해하고 일치를 이루어 서로를 품어 줄 때,

서로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뻔까지 해야 합니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야 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서로 화해할 수 있게 하고, 우리를 일치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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