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6월 25일 토리노의 성 막시모 주교

수성구 2022. 6. 25. 02:47

6월 25일 토리노의 성 막시모 주교

축일:6월25일
토리노의 성 막시모 주교
St. Maximus of turin
San Massimo di Torino Vescovo
Born: c.380 at Rhaetia
Died: c.466 (m. c. 423)
Canonized:Pre-Congregation
Massimo = grandissimo, dal latino

 

 

막시모는 라틴어로 '가장 큰'이란 뜻이다.
교회사가 젠다니우스의 "교회 저술가들의 책" 속에 언급된 막시모는
토리노의 주교이며, 많은 책들의 저자이고, 뛰어난 설교가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특히 그는 성서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451년, 그는 밀라노 시노드에 참석하여, 저 유명한  "교의 편지"에 서명도 하였다.


또한 그는 465년의 로마 공의회에도 참석하였다.

브루노 브루니가 편찬한 전집에 의하면,
그의 설교문이 116개, 6개의 논문 그리고 주일 강론이 118개나 남아 있었다고 한다.


교우들의 일상생활에도 특히 관심이 많았던 그는,
신자들의 일상 임무 중에 가장 우선하는 것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으로서,
이를 위하여 적당한 방법으로 시편을 외우라고 권하고,
또한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빠트리지 말것이며,
식사 전후에 감사기도를 바치고,
모든 일을 하기 전후에 십자성호를 그으라고 명했던 최초의 주교로 공경받는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시노드
라틴어 synodus 독일어 Synode  영어 synod


어원은 그리스어의 'sunodus' (회의)로 주교관할권하에 있는 교리, 규율,
전례의 문제를 토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교회의 권위 하에 열리는 교회회의를 말한다.
현재 시노드란 참석자들이 의결권을 갖지 않는 공청회적인 성격의 구교회의나
갖가지 규모의 주교회의에 사용되고 있다.

 

초기 교회 이후 수세기간 `시노드'와 ' 콘칠리움'(conctlium)은
서로 동의어로 엇바뀌어 쓰였으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서로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325년의 니체아 공의회 이후
교회일치를 위한 큰 규모의 교희 회의에는 '콘칠리움'이 배타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것은 우리 말로는 `공의회'(公儀會)로 번역되었다.

 

비록 성격이 다른 지역공의회가 있으나 시노드는 한 교구나 관구,
그리고 그 이상의 규모로 한 교구의 주교와 성직자, 여러 교구의 주교들과 성직자,
혹은 주교들만이 모여서 여는 교회희의로
공의회와 다른 점은 참석자들 모두가 의결투표권을 갖지는 않는다는 점에 있다.

 

트리엔트 공의희 (1545 1563년) 이후 시노드는 교구 주교가 소집하며
입법적 결정권은 소집한 주교 한 사람만이 갖는 교구 시노드(Synodus dioecesana)를
뜻하기도 하였으나 새 교회법에서는 교구 시노드 뿐 아니라 주교 대의원희
(혹은 주교 시노드)를 뜻하기도 한다.
(가톨릭대사전에서)

 


공의회 公議會
영어 ecumenical council

교황에 의해 소집된 전세계 가톨릭 주교들의 모임.

교황은 공의회 회의록을 준비하고, 그 결정들을 재가한다.

이 모임은 보편교회에 관련되는 중대 사안들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다(교리서 884).

(현대가톨릭수첩에서)

 

 

보편공의회 普遍公議會
영어 ecumenical council

(보편)공의회란 로마의 주교인 교황의 권위 밑에 모든 가톨릭 주교들('주교단')이 함께 모인 모임을 가리킨다.

교회법에 따르면 "주교단은 보편교회에 대한 권력을 보편(세계) 공의회에서 장엄한 양식으로 행사한다."(교회법 제337조 1항).

보편공의회와 관련된 교황의 권한에 대해서 교회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보편(세계)공의회를 소집하고 이를 몸소 또는 타인을 시켜 주재하며,

또 공의회를 옮기거나 중지하거나 해산하거나 또한 그 교령들을 승인하는 것은 오로지 교황의 소임이다."(교회법 제338조 1항).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는 21회의 보편공의회가 열렸다(교리서 883-885).

(현대가톨릭수첩에서)

 


트렌트 공의회

영어 Council of Trent

1545년부터 1563년 사이에 25회기 동안 개최된, 가톨릭 교회의 제19차 보편공의회이다.

이 공의회의 일차적 과업은 종교개혁자들의 공격을 거슬러 가톨릭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옹호하는 중에 공의회는 또한 의화(義化), 원죄, 은총, 신앙, 7성사(특히 성체성사),

성인 공경, 연옥, 은사 등 가톨릭 교리의 핵심적 주제들의 본성에 대한 포괄적인 논술을 제시하게 되었다.

 

트렌트 공의회는 전례, 신자들의 신앙교육, 사제직 지망자의 훈련, 교회의 신심생활 등과 관련된

다양한 가톨릭 쇄신운동을 가동시켰다. 그 영향력은 광범위했고 긍정적이었다.

트렌트 공의회는 교회의 중요한 보편공의회로 평가받고 있다(교리서 884).
(현대가톨릭수첩에서)

 


트리엔트공의회 
라틴어 Concilium Tridentinum 영어 Council of Trent

 

1545∼1563년까지 약 18년간에 걸쳐 이탈리아의 북부 트리엔트(현 Trento)에서 개최된 공의회로

종교개혁으로 혼란스러워진 가톨릭 교의(敎義)를 명백히 하였고, 교회개혁을 추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소집되었고, 율리오 3세를 거쳐 비오 4세의 재위기간에 폐회되었다.

세리판도(G. Seripando), 소토(Dominicus de Soto), 라이네스(D. Lainez), 살메론(A. Salmer n),

그로퍼(J. Gropper), 베르타노(P. Bertano), 포스카라리(A. Foscarari) 등 저명한 신학자들이 대거 참석하여

가톨릭 고유의 교의를 확립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대체로 다음의 3기로 구분된다.


① 제 1 기 :

1545년 개회되어 1548년 정회(停會)될 때까지 약 3년간의 기간으로 이 동안 공의회는

성서만이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 된다고 한 프로테스탄트의 주장을 이단으로 배척하고,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성서와 성전 (聖傳)모두가 신앙의 원천임을 재확인하였다.

아울러 불가타역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성서의 해석권은 교회만이 갖는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또한 프로테스탄트의 은총절대설과 정의가산설을 배척하고 원죄와 의화에 대한 정의를 명 백하게 규정하였다.

성사에 대한 교리도 제1기에 규정되었다. 황제 칼과 교황 사이의 관계 악화로 중단되었다.

 

② 제 2 기 :

교황 바오로 3세의 후계자 율리오 3세가 1551년 개회하여 다음 해 독일 제후 들의 봉기로 좌절될 때까지 

약 1년간의 기간으로 성체성사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現存)'과 `실체변화(實體變化),

고해성사, 병자성사, 사죄 (赦罪), 비밀고해, 보속 등의 교리가 정의되었다.

제2기에는 제1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독일지방의 주교들이 참석하였고,

황제의 입김으로 프로테스탄트들도 참석하였다.

 

③ 제 3 기 :

가장 성과가 많았던 회기로 제2기가 끝난 뒤 약 10년 후인 1562년에 개회되어 이듬해 폐회되었다.

이 회기 중 가장 중요한 심의대상은 성체성사와 미사, 사제서품, 혼인성사에 관한 것들이었고

이에 관한 교리가 규정되었다. 그밖에도 모든 성인의 통공, 성인유해의 공경, 연옥, 대사, 성화상의 사용,

교구신학교 설립, 주교의 임명, 교구 시노두스, 강론 등에 관한 교령이 반포되었다.

 

예딘(H. Jedin)이 "트리엔트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대한

교회의 교도직으로 응답한 최고의 대답이었다"고 한 바대로 프로테스탄트가 제기한 문제를 수렴하여

가톨릭의 신앙과 교리에 대해 명확히 함으로써 교회의 영성생활에 기반을 제공하였고,

그 뒤 계속된 교회의 개혁에 기초를 닦아 놓았다.

 

공의회의 신앙고백은 공의회가 폐막된 1년 후인 1564년 <트리엔트 신앙고백>

(Professio fidei Tridentina)이란 이름으로 발표되었고,

그밖에 공의회 에서 마무리짓지 못한 문서들은 후임 교황들에 의해 차례로 발표되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불가타  
라틴어 Vulgata 영어 Vulgate

405년에 라틴어로 완역되어 가톨릭 교회에서 널리 사용된 성서(聖書)의 이름,
불가타란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고 있다는 뜻으로,
예로니모(Sophronius Eusebius Hieronymus)가 번역하였다.

 

시편을 제외한 구약성서는 히브리어에서 직접 번역하였고,
신약성서는 이미 번역되어 있던 라틴어 역본(譯本)을
그리스어 원본과 대조해서 정정한 것인데,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그 신빙성을 공인받았다.

1907년 성 비오 10세는 베네딕토회 수사들로 구성된 불가타 위원회를 로마에 설치하여
새로운 개정판 간행을 촉진하였다.

(가톨릭대사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