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6월 22일 놀라의 성 바울리노 주교

수성구 2022. 6. 22. 06:23

6월 22일 놀라의 성 바울리노 주교

축일:6월22일
놀라의 성 바울리노 주교
ST. PAULINUS of Nola
St. Paulinus a Nola, E

San Paolino di Nola Vescovo
Born:c.354 at Burdigala, Gaul (Bordeaux, France)
Died:22 June 431 of natural causes
Canonized:Pre-Congregation
Paolino = piccolo di statura, dal latino

 


예닐곱 명의 성인들의 편지에서 칭찬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의심할 나위 없이 뛰어난 성품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으로 파울리노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예로니모, 멜라니아, 마르티노, 그레고리오 그리고 암브로시오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

 

보르도 근처에서 태어난 그는 골 지방과 이탈리아에서 엄청난 부자로 손꼽히던 골 지방 로마 총독의 아들이었다.

파울리노는 뛰어난 법률가가 되엇으며 로마 제국에서 몇 가지 공직을 맡았다.

그는 스페인 여인인 아내 데레시아와 함께 젊은 나이에 은퇴하여 문화적인 여가 생활을 즐겼다.

그들 부부는 덕망있는 보르도의 주교에게서 세례를 받고 스페인에 있는 데레시아의 큰 저택으로 이사했다.

 

여러 해 동안 아이가 없던 그들에게 아이가 생겼지만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은 그들이 엄격한 생활을 시작하고 애덕을 실천하며

스페인에 있는 재산을 거의 다 나누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뛰어난 모범의 결과이겠지만 파울리노는

성탄날에 바르셀로나의 주교에게서 예기치 않던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뒤 그는 아내와 함께 나폴리 근처의 놀라로 갔다.

 

그는 놀라의 펠릭스 성인(축일:1월14일)을 무척 존경했고

이 성인에 대한 신심을 진작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친척들이 모두 당황해할 만큼 자기의 남은 재산을 거의 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을 위한 일을 계속했다.

빚을 많이 진 사람과 방랑자, 그 밖에는 여러 궁핍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그는 자기 집의 한쪽 구석에서 수도 생활을 하는 것처럼 살았다.

그는 주민들의 요청으로 놀라의 주교가 되어 21년 동안 그 교구를 이끌어 갔다.


놀라시가 훈족의 침략을 받자 그는 슬픔에 젖어 말년을 보냈다.

그의 얼마 안되는 작품 가운데에 초기의 그리스도교 혼인 축가가 남아 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초기에 힘을 발산해 버리고 일찌감치 은퇴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업에 대한 헌신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서 성취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파울리노의 인생은 그가 스페인의 자기 소유지에서 편안히 쉬면서

자기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시작된 것이었다.

인간은 시도하고 하느님은 마련하신다.

 

한 사람의 목격자가 파울리노의 마지막 날을 기록했다.
그가 죽기 3일 전에 한 사제가 와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40은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누군가가 그 가난한 사람의 빚을 갚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심부름꾼이 50은전의 선물을 가져왔다.

마지막 날 저녁 기도를 바치기 위해 불을 켜놓고 있을 때

그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팔을 뻗으면서 말했다.
"나는 나의 그리스도를 위해 등불을 마련했습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313년, 콘스탄티노 대제가 자신도 그리스도교에 개종하는 동시에 유명한 밀라노의 칙령으로써

종교에 신앙의 자유를 준 다음부터는 국민도 서로 다투어가며 세례를 받는 등 교회는 한때 융성해졌다.

그러나 이것은 양적(量的)으로 하는 말이고, 질적(質的)으로는 유감스러운 점이 없는 신자도 적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진실한 마음에서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유행을 따른다는 경솔한 마음에서

별로 교리 공부도 하지않고 입교한 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그러한 폐풍은 상류 인사층에 더욱 극심해 지금 말하려고 하는

성 본시오 메로비오 바울리노의 양친도 그 중의 하나였다.

즉 신분이 원로원 의원이고 귀족이었던 어버지나 어머니는 명칭이 신자이지

그 일상 생활에는 이교도나 다름없는 생활이 엿보였던 것이다.

 

성 바울리노는 353년 프랑스의 부르도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지금 말한 것과 같이 종교에 냉정한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아들도 그리스도교적인 좋은 감화를 받을 리가 없었다.

 

첫째 그는 세례조차 받지 못했다.

그리고 다만 세속적인 출세만을 목적으로 당시 대학자이며 대시인으로 평판이 높았던

 오소니오의 지도를 받아가며 열심히 고웁했다.

본래 그는 재주가 많았음인지 학업 성적은 가장 우수해

겨우 25세의 청년으로서 일찍이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의 집정관으로 임명되었다.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던 그는 경치 좋은 이탈리아의 캄파니아에서 살면서

같은 재산가이며 신앙이 두터운 테레시아라는 스페인 귀부인과 결혼했다.

그때 그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신앙의 눈을 떴다.

 

그는 신심이 깊은 아내의 감화로써 열심히 준비해 이때까지 받지 않고 있었던 세례를

고향 보르도의 주교 델피노에게서 받았다.

그때 그는 당시의 위대한 성인 트리의 주교 마르티노도 만나보고

그의 기도로 인해 눈병이 치유되는 은총을 받기도 했다.

 

바울리노는 열심히 신앙을 보존하고

세례때 약속한 대로 마귀와 그의 모든 행실과 모든 영화를 끊어 버리려고 애썼다.

그리하여 친척 일가의 놀람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진하여 집정관의 영직을 내던지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가서 재산의 대부분을 자선 사업에 기부하고 사랑하는 처자와 같이

검소한 생�b로 들어가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였다.

이런 그의 대변화를 들은 은사 오소니오는 대단히 놀라며 몇 번이나 서간이나 말로써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활발히 활동할 것을 권했으나 바울리노는 그 호의에는 감사하면서도

악마의 유혹이 많은 세속의 높은 지위에 취임할 의사는 추호도 없었다.

특히 귀한 외아들을 어려서 잃은 후에는 아내와 서로 의논하여 남매와 같이 지내며 정결한 생활을 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이전의 대부호는 가난하게 살면서

향락 대신에 자선 사업을 하며 매일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를 도모했다.

그러므로 바르셀로나 신자들은 누구나 바울리노의 덕행에 감동하지 않은 이 없어 자꾸만

사제가 될 것을 권했으므로 그도 그 간청에 못이겨 마침내 393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신품 성사를 받게 되었다.

 

성직자가 되었어도 바울리노의 수도 생활은 결코 허술해지지 않았다.

그는 더욱 수양을 하려고 신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르셀로나를 떠나 이탈리아의 놀라시에 가서

자기가 특별히 존경하는 순교자 펠릭스의 묘지 근처에서 살며 호로 세상을 멀리하고 기도와 고행에 전심했다.

바울리노가 그 성인을 공경하게 된 이유는 전에 그가 무서운 형제 살해의 혐의를 받았을때

펠릭스의 전구를 구해 다행히 그 혐의를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울리노의 감탄할 만한 일상 생활이 어느덧 세상에 알려지자 수도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은

점차 그의 덕을 사모하여 모여와 그의 지도를 받으며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뿐아니라 409년 놀라 시의 주교가 서거하자

신자 일동은 충심으로 바울리노에게 그 후임이 되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는 그곳에 피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알고 취임을 승낙했다.

그의 겸손, 예지, 박애(博愛)는 주교좌라는 높은 촛대위에 놓이게 되자 한층 더 찬란히 세상을 비추게 되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같은 시대의 사람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예로니모 등

쟁쟁한 교부들도 그와 서면으로 연락하는 것을 큰 자랑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유럽에 민족 이동이 일어났을 때 놀라 시에도 처음에는 고트족, 나중에는 반달족이 침입해 마음대로 약탈했다.

그럴 때에 바울리노 주교는 그들의 독수에 걸려 고생하는 이나 노예로 된 불쌍한 이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 지 모른다. 어느 전승에 의하면, 한 노예를 풀어 줄 대금이 부족했을 때에

그는 자기가 대신 노예가 되어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해 주려고 까지 했다고 한다.

놀라시가 야만족 침입의 재앙에서 모면하게 된 것은 오로지 주교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울리노는 놀라의 주교로 20여년간 알뜰히 그 임무를 완수하고, 431년 6월 22일, 성덕의 상을 얻으러

영원한 환희로 들어갔으며 그의 이름은 지금도 성인 명부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놀라의 성 바울리노 주교의 편지에서

(Epist. 3ad Alypium, 1. 5.6: CSEL 29, 13-14. 17-18)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모든 종들 안에 당신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참으로 거룩하고 복되며 지극히 사랑하는 주교님,

귀하는 보잘것 없는 나에게 진실하고도 완전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카르타고에서 돌아온 우리 조카 줄리앙을 통하여 귀하의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그 편지는 귀하의 탁월한 덕행을 잘 드러내 주어,

내가 귀하의 사랑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사랑은 틀림없이 세상 시초부터 우리를 예정하신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는 그분 안에 있었습니다.

미래에 성취해야 할 모든 것도 그분이 지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선견과 권능으로

우리는 동일한 의지와 신앙의 일치 또는 일치의 신앙을 갖도록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연결되고 영의 계시를 통하여 마주 보기 전에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 어디서나 유일한 분이신 주님께서 모든 이에게 부어주신 성령으로 당신의 모든 종들 안에서

당신 사랑을 역사하시는 데 대해 우리는 주님께 감사 드리고 찬미 드립니다.

이렇게 하시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넘치는 강물로부터 당신 도성을 기쁘게 하셨고

이 도성의 시민들 위에 "당신 백성의 으뜸으로" 귀하를 선택하시어 주교좌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구부러진 나를 바로 세우시고

미천한 나를 땅에서 끌어올리시어 귀하과 같은 지위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하느님께 감사 드려야 하는 것은 그분이 귀하의 마음에다 내가 들어갈 자리를 마련하시고

귀하와 밀접히 일치시켜 귀하가 나에 대해 지닌 그 사랑의 확신을 느끼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귀하가 베풀어 준 배려와 호의를 볼 때

나로서는 귀하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는 데 주저하거나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귀하가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도록 내 사정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나는 전에 불쌍한 죄인이었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해방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생명의 공기를 호흡하기 시작하고 쟁기를 잡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귀하는 기도로써 도와주시기를 청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어 내 짐을 가볍게 해주신다면 귀하의 공로에 상급을 더할 것입니다.

고통중에 있는 이를- 나는 감히 귀하의 형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도와 주는 거룩한 사람은

"큰 도성처럼 드높여질 것입니다."

 

나뉨이 없으신 삼위 일체의 일치와 우리 간의 일치의 표시로 귀하에게 빵 한 개를 보내 드립니다.

귀하가 그것을 드신다면 그 빵은 "에울로기아"(축성된 빵) 가 될 것입니다.

(가톨릭굿뉴스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