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6월 20일 복녀 미켈리나

수성구 2022. 6. 20. 04:58

6월 20일 복녀 미켈리나

축일:6월20일
복녀 미켈리나
Bl. MICHELINA of Pesaro
Beata Michelina (Metelli) da Pesaro

Beata Michelina (Metelli Malatesta) da Pesaro
Born:1300 at Pesaro, Urbino, Italy
Died:1356 of natural causes
Beatified:13 April 1737 by Pope Clement XII (cultus confirm‎‎!!!ed)
Michelina (come Michele) = chi come Dio, dall'ebraico = who like God, dall'ebraico

Third Order Franciscan

 

부유하고 이름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미첼리나 메텔리는 12세 때에 리미니의 말라테스타 가문의 아들과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하였지만, 20세에 남편과 사별하여 과부가 되었다. 그녀에게는 어린 아들 하나가 있었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마음이 안정될 수는 없었다. 그때 미첼리나는 프란치스코 재속 3회원이 되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로 보내고, 애긍으로 생활하였으며, 밤이면 은혜로운 사람들이 베푸는 곳에서 쉬곤 하였다.

 

그러던 중에 아들을 잃게 되자 그녀는 이 세상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었다. 그녀는 철저한 고행과 기도생활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나병환자들을 돕거나 온갖 자선활동으로 지친 몸으로 주님과 하나 되는 행복감을 맛보았다. 임종이 가까워 올 즈음에 그녀는 로마(Rome) 순례를 했는데, 이즈음에 그녀는 56세의 일기로 운명했다. 전통적으로 그녀의 축일이 오면 램프 불을 밝힌다고 한다. 그녀가 문전걸식할 때에는 아무도 불을 밝혀주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이다.
(가톨릭홈에서)
 

 

부유하고 이름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미켈리나 메뗄리는

12세 때에 리미니의 말라떼스따 가문의 아들과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하였지만

그 남편과 사별하여 과부가 되었다.

그녀에게는 어린 아들 하나가 있었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마음이 안정될 수는 없었다.

 

그때 미켈리나는 프란치스꼬 재속 3회원이 되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로 보내고, 애긍으로 생활하였으며,

밤이면 은혜로운 사람들이 베푸는 곳에서 쉬곤하였다.

그러던 중에 아들을 잃게 됨으로써, 그녀는 이 세상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었다.

그녀는 철저한 고행과 기도생활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나병환자들을 돕거나 온갖 자선활동으로 지친 몸으로 주님과 하나되는 행복감을 맛보았다.

임종이 가까와 올 즈음에 그녀는 로마 순례를 했는데, 이즈음에 그녀는 56세의 일기로 운명했는데,

전통적으로 그녀의 축일이 오면 램프불을 밝힌다고 한다.

그녀가 문전걸식할 때에는 아무도 불을 밝혀주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인 것이다.

(성 바오로수도회홈에서)

 

 

 

 

Il Crocefisso di San Damiano

 

재속 프란치스코회란?

 

Ordo Franciscanus Saecularis

 

"Ordo Franciscanus Saecularis" 라는 명칭은 이전까지 ’프란치스코 3회’라고 불리우던 것을

교황 바오로 6세께서 1978年 새 회칙을 인가하시면서 붙여준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이천년의 긴 역사를 살아오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수많은 영적 가족들을 탄생시켰고,

그 중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창설자로 모신 1, 2, 3회의 영적가족이 있으니

그 숫자가 오늘까지 8백년 동안 수천만에 이르렀고 현재의 가족수도 백만이 훨씬 넘는다.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 가족들

1회는 프란치스코 남자 수도회를 말하고,

2회는 글라라회라고 불리우는 여자수도회(관상수녀회)이며,

3회에는 수도생활을 하는 정규3회,수도자인 수도 3회와 재속 신분으로 구성된 재속프란치스코회를 말하며,

(전국 51개의 형제회와 6,50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들 프란치스코 영적 가족의 공통된 특징은 말할것도 없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이다.

 

세 가족의 친교와 고유 역할

이 세가족은 활기에 찬 친교를 이루면서도 각기 다양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성 프란치스코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실천한 빛나는 영성들을 스스로 배우고 익혀,

교회가 더욱 주님의 거룩하심으로 충만되도록 돕는다.

 

"선교활동"을 펴서 이 세상을 하루 빨리 하느님 나라의 질서에로 돌아오는데에 그 공동목표를 두고

가톨릭 교회 안에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러 계층의 형제회 즉.

지역, 지구, 전국, 국제형제회들을 묶은 하나의 조직체이다.

"입회자격은, 50세 미만의 가톨릭 신자이면 되고, 영세한지 3년이상. 견진성사를 받은 자라야 합니다.

 

교황이 인가한 세계적 공동체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성 프란치스코 가족 중의 하나로서 독자적인 위치를 가지고

온세계 모든 평신도와 재속 사제들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또한 가톨릭 교회 안에서 교황이 인가한 회칙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러 계층의 형제회,

즉 지역, 지구, 국가형제회들을 묶은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기원과 발전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제자들과 함께 로마로 사도적 여행을 한 1212년경,

기혼 남녀 평신도들이 프란치스코와 그 동료들의 복음적 생활에 매력을 느껴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르려고 헌신하였던데서 비롯하였다.

 

당시에 귀족이나 천민이나 성직자나 평신도 등 많은 사람들이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에 이끌려

프란치스코에게 오기 시작하여 성인은 제3회를 생각했고,

그들에게 생활규범과 모든계층의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였다.

복자 루케치오 와 보나돈나 부부가 첫회원으로 알려져있다.

 

3회 배출 성인

제3회가 배출한 성인은 성 루도비꼬, 성 토마스모어, 성 요한 비안네,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등 60여명이 되고,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바오로 6세까지 20여명의 교황과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 시성 단테, 예술가 미켈란젤로,

라파엘, 탐험가 콜럼버스, 레지오마리애 창설자 프랭크 더프, 빈첸시오와 바울로회 창설자 프레데릭 오자남 등

각계 각층에서 3회원들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교회를 빛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홈에서)

 

 

 

 

 

San Francesco a Subiaco

 

한국의 재속 프란치스코회 역사

 

일본의 조선인 재속 3회원

한국의 첫 재속 프란치스칸은 1922년 미국 유학 중 재속 3회에 입회하여 서약한 장 면(요한)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400여 년 전에 이미 조선인 재속 3회원이 있었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갔으며,

이들 중 다수는 노예 생활 중에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그들의 쓰라린 생활을 극복해 나갔다.

 

그 당시 일본에는 프란치스꼬 회원들이 전교를 하고 있었는데,

많은 조선인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 프란치스꼬 재속 3회에 입회했던 것이다.

 

1597년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박해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26명이 나가사끼에서 순교의 화관을 쓰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프란치스칸으로 성 베드로 밥티스타를 비롯하여 17명의 프란치스꼬 재속 3회원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 3명이 조선인이었다.

 

이들은 1627년에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862년 6월 8일에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또한, 1867년 7월 2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복된 순교자 205위 중 두 명도

한국인 프란치스꼬 재속 3회원이었다.

 

한 명은 파스칼 보스이고, 다른 한 명은 가이오리 에몬인데 모두 같은 날 순교했다.

따라서 한국의 3회의 역사에 있어 그 첫 자리는 일본에서 3회원이 된 순교자들이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재속프란치스코회홈에서)

 

 

[일본의 순교자]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

 

일본에서 태어난 바오로 미키(1564,1565-1507년) 성인은 예수회에 들어간 다음,

복음을 널리 퍼뜨리는 데 큰일을 하였다.

 

박해 때 다른 동료 25명과 붙잡혔는데,

그 25명은 베드로 밥티스타와 5명의 프란치스코 제1회 회원들과 17명의 제 3회 회원을,

그리고 미키 신부와 일하던 2명의 교리교사였다.

그들은 모진 고문을 받고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