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성체와 성혈의 신심

수성구 2022. 6. 19. 05:13

성체와 성혈의 신심

신명 8,2-16; 1코린 10,16-17; 요한 6,51-58

성체와 성혈 대축일; 2022.6.19.; 이기우 신부

 

1. 전례적 의미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그 전례적 취지는 신자들로 하여금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다양성 안의 일치를 이룩하기 위한 실천적 지혜가 바로 자신과 세상의 거룩한 변화를 이룩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성사적 변화를 거행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임을 일깨우고자 함입니다. 

 

2. 카파르나움 평원에서의 엇갈린 반응, 열광하거나 의심하거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 평원에서 오천 명도 넘는 많은 군중 앞에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는데, 이때 배고팠던 군중은 많아진 빵에 열광하였습니다. 그러나 열광하는 군중을 떠나 근처의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좀 더 차분하게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썩어 없어질 빵을 구하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는 빵을 구하라.”(요한 6,27)고 그분이 말씀하시자 말귀를 못 알아들은 군중이 “그 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였고, 그분이 재차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35.41.51). 

빵에만 열광하던 군중은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거나,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 하며 떠나갔습니다. 

 

  빵을 배불리 먹을 때에는 열광하던 군중이 이렇게 의심하거나 반문하며 떠나버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결단을 재촉하셨습니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요한 6,67). 믿든지 떠나든지 하라는 매우 단호한 어조였습니다. 그러자 망설이며 눈치만 보면서 선뜻 대답하지 못하던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가 나서서 고백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생명을 주는 말씀을 지니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에게 가겠습니까?”(요한 6,68). 

 

  그 다음, 생명의 물에 관해서는 예루살렘에서 초막절 축제 마지막 날에,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요한 7,37-38)이라고 군중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군중도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예언자나 메시아로 알아본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분이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2.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2003년에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는 제목의 회칙을 반포하여  성체성사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확정하였습니다. 이 문서에 의하면, 성체성사에 관해 공식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기점은 트리엔트 공의회입니다. 

 

  이 회칙에 따르면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성찬례의 빵과 포도주 안에 ‘참되고, 실재적이며, 실체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어 성체와 성혈로 거룩한 변화가 일어난다고 표명했는데, 이는 성경이 진술하고 있는 성체성사에 관한 계시적 언급을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해석해 놓은 성전(聖傳) 즉 거룩한 전통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거룩한 변화를 중세 유럽의 철학적 사유로 엄정하게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변화에 대한 이 세 가지 형용부사, 즉 ‘참되고, 실재적이며, 실체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라는 트리엔트식 표명은 중세에 특유한 형이상학적 용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상하게 설명한다 해도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성서적 형용부사 이상으로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체성사의 질료인 빵과 포도주가 성령의 개입 없이도, 즉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전제하지 않고도 거룩하게 변화될 수 있다는 뜻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세와 근세에 성체성사를 둘러싼 해프닝이 두 가지 일어났는데, 트리엔트식 성체 교리 설명의 한계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3. 성체성사를 둘러싼 현실 하나 : 루터는 뛰쳐나가고…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베드로 대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던 교황청 관료들의 부패와 과도한 모금 행위에 항의하는 95개조 반박문을 1517년에 독일 비텐부르크 성당 문에 내걸었습니다. 이 항의에 대해 레오 10세는 파문으로 응수했고 결국 이 파문장을 찢어버린 루터는 성체성사를 비롯한 성사의 효력 모두를 폐기한 채로 가톨릭교회를 뛰쳐나갔습니다.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제직무는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제정된 것인데, 과도한 모금 행위와 이로 말미암은 부패한 사제상은 파스카의 역사적 정신에 대한 섬김과 함께 상호 섬김과 그것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섬김으로 뒷받침되어야 할 성체성사의 거룩한 변화를 인효적(人效的)으로 – 사효적(事效的)으로가 아니라 -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루터의 항의는 정당하였고 교황청에서는 이를 종교적 관용으로 수용하고 부패상과 과도한 모금 행위를 중단했어야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파문으로 응수하고 완강하게 버티는 바람에 서방 교회는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성체성사의 필요조건인 사제직의 섬김 윤리가 관철되지 못하는 바람에 생겨난 역사상의 해프닝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를 뛰쳐나간 루터와 그에 동조한 개혁가들이 세운 공동체들 역시 성사적 효력 자체를 부인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성사 없는 공동체로 남아 있습니다. 성사 없이는 교회성도 담보할 수 없기에, 가톨릭교회 공식 문헌에서는, ‘개신교 공동체들’이라고만 쓰지 ‘개신교 교회’라고 부르지 않으며 교회 일치 운동에 있어서도 그들 개신교 공동체가 성체성사에로 돌아오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당시까지 이단으로 단죄했던 개신교 공동체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갈라진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일치 교령’을 반포함으로써 재일치를 향한 담대한 도정을 시작한 바 있습니다만 재일치로 향한 여정에서 가장 큰 관건은 이 갈라진 형제들이 성체성사에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4. 성체성사를 둘러싼 현실 둘 : 브루노는 화형당하고… 

트리엔트 공의회의 설명은 이미 그전부터 행해져 오던 성체성사의 이해를 반영한 것이었는데, 이에 대하여 반발한 인물이 있습니다. 당시 교회가 이 거룩한 변화를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차원에서 실체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식으로까지 과도하고 무지하게 성체성사의 거룩함을 가르쳤던 관행에 반발하여 도미니코 수도회의 사제 브루노(1548-1600)는 자연과학의 이론을 인용하여 모든 물질에 하느님의 영이 작용하고 있으며, 성체성사 중에 빵과 포도주가 물질적이고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가 아니라 마법사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학술적으로 반박하였습니다. 

 

  브루노의 이 같은 주장은 빵과 포도주의 실체적 변화를 과도하게 주장했던 당시 교회 교도권에 반박하기 위한 것이기는 했으나,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고 그 은총으로 우리의 인격과 삶이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함을 가르치는 성체성사의 신학적 본질에 비추어 보면 역시 초점이 빗나간 반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책임은 애초에 성체성사 교리의 프레임을 잘못 짜 놓은 교회 당국에 돌아가는 것이지, 문제를 제기한 브루노에게 돌아갈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는 종교재판을 받아야 했고, 교권 당국은 끔찍하게도 그를 화형시켜 버렸습니다(1600년). 이는 성체성사의 충분조건인 성령의 개입과 그리스도의 현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데서 생겨난 역사적 해프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이 중세 가톨릭교회의 분위기의 일단을 잘 말해줍니다. 결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 브루노를 화형시킨 사건에 대한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는 분위기 속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에 브루노에 대한 사형 선고가 부당하다는 재심 판결을 내렸고 2000년에는 브루노 처형 400주년을 맞아 폭력적인 사형 선고와 집행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하였습니다. 

 

5. 성체와 성혈 신심의 실천을 향하여

오늘 전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우리가 성체와 성혈의 성사에 참여하여 삶과 세상 일에서 거룩한 변화를 이룩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아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는 성체와 성혈의 성사를 세우셨는데, 교회는 절차상의 문제를 이유로 성찬례를 성체성사로만 좁혀서 기념하는 관행도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가 우리 영혼을 양육하는 생명의 빵이라면, 그리스도의 피인 성혈은 우리가 사랑의 희생을 각오하고 다짐하는 생명의 물인데, 성체와 성혈의 신심은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하느님 나라로 이끌기 위하여 생겨났습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기운도 얻어야 하지만 우리가 바칠 희생도 각오해야 하는데, 희생을 아끼려는 오래된 관행은 성혈 신심을 망각한 데에서 기인한 듯합니다. 

 

  그래서 성체와 성혈 대축일인 오늘, 생각해 볼 주제는 균형의 회복입니다. 첫째, 성령의 개입 및 그리스도 현존에 대한 믿음이라는 성찬례의 충분조건과 섬김으로 나타나야 할 사제직의 윤리라는 필요조건 사이의 균형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둘째, 이를 위해 우리가 거룩한 기운을 얻기 위한 성체 신심과 우리의 희생을 다짐하는 성혈 신심도 균형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 성찬례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나타나야 할 인격의 거룩한 변화와 세상의 거룩한 변화 사이의 균형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교회는 성체와 성혈의 성사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고, 이는 믿지 못하면 떠나야 할 만큼 너무도 중요한 계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