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의 TMI
어르신들의 TMI
(안지은 공무원)
한가한 시골 우체국에서 일하다 보면 창구에 오시는 손님들 대부분이 어르신이다.
아침 9시에 문을 여는데도 8시 40분이면 문 앞에 서 계신다.
큰 목소리로 어머니~~이리로 들어와 앉아서 기다리세요.
추워요!! 하는 것이 일상이다.
어르신 손님을 대하는 것은 당황의 연속이다.
띵동..어서 오세요~소포 내용물은 어떻게 되십니까?
어르신들은 앉아 계시던 곳에서 창구로 걸어오시면서부터 말을 시작하신다.
아이구~ 주말에 온 ~아들 가족들이. 할머니 보러온다고...
큰 아들하고 둘째 아들하고. 작은 딸래미하고. 손주하고 와서 저녁먹고 드라이버 갔어.
그런데 차에다 손주가 핸드폰하고 놀이 카드를 놔두고 간 거여.
그 놀이 카드가 아파트 또래들 사이에서 유행인가 봐~~
그게 없으면 또 안되는거여. 전화와서 보내 달라구 아이고~참내...
아~~^^핸드폰하고 카드 넣으셨어요?
파손 주의 스티커도 하나 붙여드릴게요. 어머니~
우리 같은 요즘 세대들에게 이런 상황은 소위 말하는
TMI Too Much Information이다.
정보의 홍수와 한정된 시간 속에서 핵심만 명료하게 알고 싶은 마음.
길게 이야기하는 것도. 듣는것도 피곤한 우리 세대에서 생겨난 말이다.
처음에는 그냥 소포 내용물이 무엇인지만 간단하게 말해주시면 될걸..
일하기도 바쁜데 언제 이야기를 다 들어드리나..하는 마음도 있었다.
이후 금융 창구로 보직 이동을 하고 일을 배우면서 크고 작은 실수가 연속이었다.
자책도 하고. 손님들께도 죄송한 마음으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냈다.
하루는 한 할머니께서 십만원을 통장에서 찾아달라고 하시는 것을
그만 십만원도 드리고 할머니 통장에도 십만원을 입금해 버리는 실수를 했다.
할머니가 가시고 아차! 싶어 부랴부랴 전화를 했다.
어르신~제가 실수로 돈도 드리고. 통장에도 십만원을 넣어드려버렸어요!
바쁘시겠지만 우체국에 한번만 들러주시겠어요?
우는 소리를 하며 방문을 부탁드렸다.
다음날 창구로 오시며
어제 무슨 돈을 잘못 넣었다고 해서 왔어~ 괜찮아.
다시 하면 되는 거라면서? 하시는 것이었다.
거듭 걸음 하게 해서 호통을 치실줄 알았는데...
빠르게 일 처리를 도와드리고 `죄송합니다. 어르신. 와주셔서 감사해요...하려는데
할머니는 작아진 내 등을 몇번이고 쓰다 듬으며
아가. 일을 하다보면 그런 일이 생길수 있어. 사람이니까.
나라고 젊을 때 실수 안 해봤겠어?
지난번에 오니까 창구에 새 아가씨가 앉아있더라고.
어제 전화로 아가씨가 실수했다고
어떡해~어떡해~ 하길래 아이고. 그 아가씨가 지금 혼나겠구나~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내가 이렇게 숨이 찬데 일찍 집에서 나왔거든. 괜찮아. 괜찮아~~
다독다독 등을 두드리며 해주시는 위로를 들으니 눈물이 핑돌았다.
여태까지의 피로와 손님들을 응대하면서 쌓였던 힘든 마음이 모두 사르르 녹는 듯했다.
우리 어르신 손님들의 TMI가 그날은 또 그렇게 신통하게도 나의 마음을 치료해주는 것이다.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자연스레 이어준다.
이제는 나도 이야기꾼이 되어 손님들에게 맞장구를 쳐 드릴 정도가 되었다.
어머니~ 얼른 보내드려야겠네.
손주만 그 놀이 카드 없으면 우얍니까?
친구들하고 어울려야지예. 함 봅시더.
어머니. 손주 집 주소가예?
빠르고 효율적인 것도 좋지만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우리는 TMI와 길고 긴 이야기.
그사이의 중간 어디쯤에서 잘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가톨릭 다이제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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