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인간 자유의 품위를 위하여

수성구 2022. 6. 16. 04:20

인간 자유의 품위를 위하여

집회48,1-14; 마태 6,7-15 /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2022.6.16.;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는 엘리야 예언자를 회고하는 집회서의 기록입니다. 구약 시대의 대표적 예언자로서 그는 불처럼 일어섰고, 횃불처럼 타오르듯이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는 죽은 자를 죽음에서 일으키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말씀에 따라 그를 저승에서 건져 냈습니다. 여러 임금들을 멸망으로 몰아넣고, 명사들도 침상에서 멸망으로 넣었습니다. 그는 시나이산에서 꾸지람을 듣고, 호렙산에서 징벌의 판결을 들었습니다. 그는 임금들에게 기름을 부어 복수하게 하고, 예언자들에게도 기름을 부어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집회 48,5-9). 

 

  엘리야는 기원 전 8세기에 활약한 예언자이고, 집회서는 기원 전 2세기 경에 기록된 성경인데, 6백 년 전의 인물인 엘리야에 대해 이런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고 특히 그가 생을 마치고 승천되었다고 기억한다는 것은, 후대 유다인들이 예언자들 가운데에서도 엘리야가 자신의 자유를 하느님의 뜻에 맞갖게 선용함으로써 자신의 생애를 천상적 가치로 들어 올린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타볼산에 올라 제자들에게 거룩한 변모의 기적으로 보여주셨을 때에도(마르 9,2-10) 그는 모세와 함께 소환되었던 대표적인 예언자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기도’라고 부르는 이 기도에는 우리가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청원해야 하는 기본 지향이 담겨 있습니다. 찬미의 지향 세 가지, 청원의 지향 네 가지 해서 모두 일곱 가지 지향이 담겨 있는데, 그 중의 핵심은 두 번째 찬미 지향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마태 6,10). 

 

  이 지향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설교의 대주제이기도 했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의지로 이미 다가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두 번째 지향은 엄밀히 말하면,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가 알아보고 이를 받아들이게 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맞추는 일, 이것이 두 번째 지향의 진정한 의미일 뿐만 아니라 모든 기도의 핵심입니다. 

 

  자유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선으로도 악으로도 기울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악으로 기울면 하와와 아담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듯이 하느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교만해질 수도 있고, 선으로 기울면 엘리야처럼 사렙타 과부의 죽은 아들을 일으키거나 바알 우상의 예언자들과 대결하여 승리할 수도 있습니다. 엘리야에 관한 열왕기와 집회서의 기록이 의미하는 바는 엘리야가 쓴 자유야말로 승천될 만한 품위를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배경으로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주어진 자유를 선용하여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며, 하느님의 뜻을 이룩하는 데 쓰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기도란 인간의 자유를 하느님의 자유에 주파수를 맞추어서 영적 교감을 이루고 이를 통로로 하여 공감대를 형성하게 해 주는 영적 노동이며, 여기에 힘을 보태어 주는 것이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베푸시는 은총으로서 인간 자유를 하늘에로 고양시키는 영적 에너지이자 선물입니다. 

 

  교회란 기도하는 신앙인들의 모임이며, 기도로 각성되어 주어진 자유를 선용할 줄 아는 개인들의 연대이기도 합니다. 이런 모임이자 연대로서의 교회가 있어야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시키실 수 있습니다. 힘의 크기로만 따지면, 우리 사람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하느님의 권능에는 턱없이 못미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협력 없이 당신의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힘이 99%라면 인간 모두의 힘을 합친 크기가 1% 정도라고 볼 수 있지만, 하느님의 99%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상수인 반면에, 인간의 1%는 매우 가변적이고 불안정한 변수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함으로써, 그것도 하느님의 주파수에 맞추어 기도함으로써 주어진 자유를 올바로 쓰라고 가르치셨고, 그리하여 하느님의 협조자가 되기를 바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현실은 남용되는 인간 자유의 무대입니다. 숱하게 시행착오를 저지르다가 드물게 성취한 결과가 크게는 인류 문명이며 작게는 우리들 개개인의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 후반부에서는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특히 중요해 보입니다. 사탄의 유혹도 하느님의 은총처럼 상수로 작용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유를 올바로 행사하면 사탄도 인간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운명과 성패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를 성숙시켜서 그 품위를 높이는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룩하는 지름길이며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