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시리라
2열왕 2,1-14; 마태 6,1-18 /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2022.6.15.; 이기우 신부
엘리야가 호렙산에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분부대로 엘리사에게 자신의 예언자 직무를 넘겨주었습니다. 회오리 바람에 실려 불 말들이 이끄는 불 병거를 타고 지상을 떠나 하늘에 오르는 이 승천의 장관은 엘리야가 수행했던 직무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아들여졌음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로부터 엘리사가 물려받는 직무도 천상의 품위를 지니고 있음을 아울러 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승천으로 장엄하게 생을 마감하는 장면은 예수님을 빼면 엘리야밖에 기록되지 않았을 정도로, 그는 예외적으로 과분한 상급을 받았습니다.
예언자로 기름부음을 받아 전투적인 일생을 살면서 고생한 그에게 하느님께서는 불 말들이 이끄는 불 병거로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영광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후 엘리야의 이름은 그 세기적 대결이 벌어졌던 산의 지명인 가르멜과 함께 화려한 승천의 기적을 보여준 ‘불 병거’(The Chariot of Fire)의 이름으로 후세에 남았습니다.
성체성사에서 일어나는 예수님의 재림과 현존의 기적은 불 병거의 장엄함과 엘리야의 권위가 일상화된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지만 이는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기적입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사람이 되셨다는 강생의 사건과, 사람이 되신 그 하느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다음에 부활하셨다는 부활 사건이 모두 기적입니다만, 이 강생과 부활 사건보다 더 큰 기적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못 박혀 죽는 희생을 자원하여 받아들이셨다는 사건입니다. 사랑의 기적이기에 그렇습니다. 강생 사건은 십자가 사건을 위해 일어난 기적이요 부활 사건은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기적입니다. 그래서 강생과 십자가와 부활, 이 세 가지가 모두 예수님의 거룩한 변화를 이루는 기반 기적이지만 가장 큰 기적은 십자가의 기적입니다. 우리네 영혼이 불말들이 이끄는 불 병거를 타고 하늘에 오르는 엄청난 기적입니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이 세 가지 예수님의 기적에서 이루어진 거룩한 변화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체를 영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이룩될 거룩한 변화를 지향하며 또한 더 나아가서는 그 삶에서 이룩된 거룩한 변화로부터 세상에서도 일상적 사랑의 활동에서 나타날 거룩한 변화를 지향합니다. 이런 행위들이 지금은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인 행위나 활동으로 보이지만, 이 행위들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일치하여 그런 비범한 정성으로 행할 수 있을 때, 보잘것없어 보여도 그것은 엄연한 사랑의 기적인 것이고, 거룩한 변화의 기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상적인 애덕 활동을 하되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께 보여드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여 봐야 달라질 게 없는데, 하느님께 보여드리면 역사가 달라집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욕심은 하찮은 것이지만, 하느님께 보이려는 정성은 고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선을 베풀 때에도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갚으려는 정성으로 하고, 기도를 할 때에도 하느님께 말씀드리려는 친밀함으로 하며, 단식할 때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더 잘 들으려는 치열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진리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으로, 사도들은 예수 부활의 복음으로, 다시 사도 이후 교부들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복음으로 이제 그 이후 지금까지는 교회가 성체성사의 복음으로 선포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름이 달리 하면서 복음의 초점을 선명하게 맞추어 왔을 뿐 완전히 동일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성체성사의 이치를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 그리스도 신앙의 정수를 이해하는 일이 됩니다.
성체성사의 진리는 거룩한 변화의 진리입니다. 성체의 기적은 거룩한 변화의 기적입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애덕 행위나 대단히 당연한 정의의 의무라 할지라도 비범한 정성으로 행할 수 있다면 기적은 일어나고야 맙니다. 믿는 이들의 마음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개입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성체의 기적은 제대에서만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삶과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이를 기적으로 알아보는 안목이요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체의 거룩한 변화를 본받아 우상숭배와 맞설 때마다 엘리야 예언자가 펼쳤던 가르멜산의 대결이 영적으로 재현됩니다. 사회적 불의에 직면하여 거룩한 의로움을 느낄 때마다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은 아합과 이제벨에게 준엄하게 경고한 엘리야 예언자가 됩니다. 일상적인 종교적 행위들, 기도와 단식과 자선도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 행위로 삼을 때마다 우리의 영혼을 불 말이 이끄는 불의 병거가 하늘로 올려다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최후의 만찬에서 당신 제자들에게 당신 사명을 넘겨주신 것처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카리스마를 독차지하려 하지 않고 기꺼이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는 미덕을 발휘할 때마다, 또 다른 엘리사들이 새로운 카리스마를 받고 충만해집니다. 숨은 일도 빠짐없이 보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과정에서 이를 기억하시고 반영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처음부터 지금까지 당신께서 하셔야 할 역할을 빼놓으시거나 놓쳐버리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의식하시고 하느님을 상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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