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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 복녀 다이아나, 체칠리아, 아마따 동정

수성구 2022. 6. 10. 04:38

6월 10일 복녀 다이아나, 체칠리아, 아마따 동정

축일:6월10일(9일)
복녀 다이아나, 체칠리아, 아마따 동정
Beata Diana degli Andalò Vergine(Bologna,1200 circa-10 giugno 1236)
Beata Cecilia Cesarini Vergine(Roma,1200 circa-Bologna,1260)
Beata Amata di Bologna
Diana = celeste, luminosa, divina, dal sanscrito = celestial, luminous, divine, from the sanscrito one

 

 

 

다이아나는 '빛의 여신'이란 뜻이다

성 도미니코가 이탈리아 내의 자기 수도회 활동을 위하여 한적한 곳을 찾았을 때,

그는 볼로냐를 택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소망하던 유명한 대학을 세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적당한 곳을 물색하여 수도원을 지었으나 반대가 극심하였다.

 

그것은 그 땅을 소유하고 있던 안달로가의 위세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안달로의 무남독녀 다이아나의 간절한 호소에 굴복하였다.

성 도미니코는 사적으로 그녀의 동정서원을 받아들였고, 가능하면 수도생활을 하도록 격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동안, 그녀는 자기집에 그대로 살면서 회개생활을 하였다.

 

그 후 그녀는 도미니코 수녀회의 수도원을 짓도록 집안 사람들을 설득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부친은 완강히 거부할 뿐 아니라 그녀가 수도회에 들어가는 것조차 금하였다.

이리하여 그녀는 집을 나와서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온 가족이 몰려와서 그녀를 집으로 강제적으로 데려왔다.

집에 온 그녀는 독방에 갇혀지냈으나, 또 다시 집을 탈출하여 록사나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녀를 방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삭소니아의 성 요르단이 안달로와 그의 아들들을 설득시켰을 뿐만 아니라,

도미니코 수도원을 짓는데 도움까지 베풀도록 마음이 누그러졌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다이아나는 1222년에 4명의 동료와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 로마의 산 시스또 수녀원에서 4명의 수녀들이 왔는데, 그들 중에 체칠리아와 아마따가 있었다.

이 두 수녀의 생활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다이아나와 마찬가지로 높은 성덕으로 유명하였고,

같은 무덤에 안장되었으며, 1891년에 시복되었다.

 

체칠리아는 체사리니의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이며 뛰어난 여성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17세 때 뜨라스떼베레 수녀원에 들어갔다.

다이아나는 1236년에 1월 9일에 35세의 일기로 운명하였고,

체칠리아는 창설자 성 도미니코를 오랜동안 도왔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녀는 세실리아, 아마따 동정녀들과 함께 1891년 복자품에 오르셨다.

이 세동정녀는 이태리 볼로냐의 도미니코 수녀원의 초창기 회원들이다.

이들은 또한 로마의 성시스토에도 수녀원을 진출시켰고

그후 성녀 다이아나가 임종한 성녀 아녜스 수녀원도 이들이 진출시켰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도미니코는 자신에 대해서도 무엇보다도 먼저 설교가라는 점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새로 창립된 그의 수도회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바쳤지만 멀리까지 두루 설교 여행을 계속했다.

그는 필요한 경우에는, 도미니코회원이 아니더라도

"설교의 은혜"를 받았다고 믿어지는 사람이면 받아들여 자신의 사명에 참여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도미니코는 호노리오 3세가 로마에

보다 엄한 새 수녀원을 세우고자 추진하고 있던 한 기획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은 확실히 필요했다.

보다 진지한 수도생활을 원하는 여성들이 있었으나 많은 기존 수녀원은

그러한 열정을 이미 상실했으므로  그들이 갈 만한 수녀원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새 수녀원을 위해 산 식스또 성당을 따로 떼어 놓았으나

그 기획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길베르트회는 그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218년, 도미니코가 그 책임을 맡게된 것 같다.

1221년 2월 한 수녀 공동체가, 도미니코의 권위 하에서, 산 식스또의 재산을 실제로 갖게 되었다.

그동안 그는 마드리드에 수녀원 하나를 세웠고, 볼로냐에도 수녀원 창립의 첫발을 내디뎠다.

1220년에 그는 그의 모든 공동체의 대표들을 소집하여 볼로냐에서 총회를 열었다.

총회에서 그는 수도회의 으뜸으로서의 지위를 사임하려고 했으나 형제들이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수도회의 본질적인 입헌적 구조에 대하여 결정해야 할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그들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적어도 한 가지 점에 대해서는 그들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도 자신의 뜻을 그들에게 강요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수사 형제들이 수도회의 모든 물질적인 면을 돌보는 책임을 져서

성직자 형제들이 연구와 설교에 온전히 투신할 수 있게 되기를 원했으나, 이 제안은 기각되었다.

총회가 끝났을 때, 수도회는 본질적인 형태를 고루 갖추게 되었고,

다만 통할에 관한 몇몇 세칙만을 이듬해 1221년에 추가하기로 했다.

도미니코회헌의 특성은 신축성에 있었다.

성 도미니코는 영원히 고정되어 있을 "거룩한 규칙"을 제정하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모든 것은 추후에 수정될 수 있도록 열려 있으며,

설교하는 수도회의 본 사명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그 어떠한 규칙도 규칙일 수 없었다.

형제들이 설교하는 일을 방해함직한 어떠한 의무나 관례도 장상은 면제시켜 줄 완전한 자유를 가졌다.

또한 개인이나 특히 공동체의 창의력에 맡겨둔 것이 퍽 많았다.

도미니코가 형제들을 얼마나 폭넓게 신뢰하고,

형제들 스스로가 살아가면서 결정하도록 배려했는가를 다시금 보게 된다.

그는 사건이 생기기 전에 미리 처리하려 하지 않았다.

총회 후에 도미니코는 다시 여행길에 나섰지만 이제 기력이 다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1221년 2차 총회에서 사회를 보고 난 후에도 다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7월 말까지는 볼로냐에 돌아왔을 것이다. 그때 그는 필경 깊은 병이 들었을 것이며

마침내 8월 6일 선종했다.

(성도미니코수도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