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6월 9일 성 에프렘 부제 학자

수성구 2022. 6. 9. 06:34

6월 9일 성 에프렘 부제 학자

축일:6월9일

시리아의 성 에프렘 부제 학자

ST. EPHREM of Syria

Sant' Efrem Diacono e dottore della Chiesa

Born: c.306 at Nisibis, Mesopotamia (in modern Syria)
Died: 9 June 373 at Edessa (in modern Iraq);

tomb in Armenian monastery, Der Serkis, west of Edessa
Name Meaning : fruitful (hebrew)

Efrem = che porta frutto, fertile, dall'ebraico = that door fruit, fertile, dall'ebraico

 


시인,교사,웅변가 그리고 신앙의 옹호자인 에프렘은

시리아 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교회 학자로 선포된 사람이다.

그는 그 당시에 난무하던 수많은 거짓 학설에 대항하는 특수한 사명을 짊어지고

언제나 진실되고 강력하게 가톨릭 교회를 옹호하였다.


메소포타미아의 니시비스에서 태어난 그는 청년 시기에 세례를 받았고

자기 고향에서는 교사로 유명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 황제가 니시비스를 페르시아에 이양하게 되자

에프렘도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처럼 에데사로 피신했다.

그는 그곳에 있는 성서학교에 크게 공헌함으로써 신용을 얻게 되었다.

그는 부제로 서품되었지만 사제가 되는 것은 사양했으며

미친 체함으로써 주교로 축성되는 것도 피했다는 말이 있다.


그는 글재주가 있었으며 그의 저술은 그의 성덕을 가장 잘 드러 내 준다.

그는 비록 대학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작품은 성서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보여 준다.

에프렘은 인간 구원의 신비에 관한 그의 저술에서 예수의 인간성과 마리아에 대한

크나큰 신심을 드러냈으며,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다정 다감한 정신을 보여 주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그의 시적인 이야기는 단테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가 그 당시의 이단을 거슬러 노래를 지은 것을 보면 놀랍다.
그는 이단자들의 대중 음악을 선택하고 그들의 가락을 이용하여 정통 교리를 표현한

아름다운 찬미가를 만들었다.

에프렘은 신자들의 교육 방법으로 교회의 공식 예배에 노래를 도입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수많은 찬미가 때문에 '성령의 하프'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에데사가 보이는 조그마한 동굴 속에 살면서 단순하고 엄격한 생활을 즐겼다.

에프렘은 그곳에서 373년경에 세상을 떠났다.

 



아직까지도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교회에서 어떤 문제를 노래로 표현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이 물려받은 개인적인 신심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노래한다는 것은 구약과 신약에서 모두 전통적으로 내려온 것이다.

노래는 기쁨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일치의 정신을 만들어 내고 표현하는 뛰어난 방법이다.

 

에프렘의 찬미가와 고대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에서 광채를 빌려오라."는 말을 입증해 준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그리스도인 집회에서 같은 것을 하기 위해 현대의 에프렘과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수들과 협력하는 것도 필요하다.

"달콤한 향기에 나를 뉘어 두지 마시오.
이러한 영예는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분향도 향료도 사용하지 마시오.
이러한 영예는 나를 이롭게 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장소에서 분향을 올리시오.
나를 위해서는 당신의 기도만으로 나를 인도하시오.
당신의 분향을 하느님께 올리고
나를 건너 찬미가를 보내시오.
향료와 향기 대신에
당신의 기도 속에 나를 기억해 주시오." (성 에프렘의 유서에서)

(성바오로수도회홍메서)


성 에프렘 부제의 강론에서
(Sermo 3, De fine et admonitione, 2. 4-5: ed. Lamy, 3, 216-222)


하느님의 계획은 영적 세계의 모형입니다.
주여, 당신 지혜의 빛으로써 우리 마음의 어둠을 몰아내시어,
이렇게 조명된 가운데 우리가 새로워져 그 순수성 안에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태양이 솟아오름은 우리 인간에게 일과의 시작을 알려 줍니다.
주여, 우리 마음에다 끝모르는 날이 빛을 비추는 공간을 마련해 주소서.
우리 안에서 부활의 생명을 볼 수 있게 해주시고
아무것도 우리가 당신께 두는 즐거움을 우리 마음에서 앗아가지 못하게 하소서.
주여, 우리가 끊임없이 당신을 탐구함으로써
우리 안에 태양의 운행에 의존하지 않는 그런 날의 표시를 새겨 주소서.


우리는 매일 성사에서 당신을 반겨 맞으며 당신을 우리안에 모시오니,
우리가 희망하고 있는 부활을 내적으로 체험하기에 합당한 자로 우리를 삼아 주소서.
우리는 세례의 은총을 통하여 우리 마음 안에 당신 생명의 보화를 지니고 있고
당신 성사의 식탁에서 이 보화가 늘어나고 있사오니,우리가 당신 은총 안에서 즐기게 하여 주소서.
주여, 우리는 당신의 영적인 식탁이 베풀어 주는 주님의 기념제를 우리 안에 지니고 있사오니,
후세생활에서 그것을 실제로 소유하게 하소서.


주여, 우리 사멸할 본성 안에서 당신 불멸의 의지가 일으키는 영적인 아름다움을 통하여
우리가 지닌 아름다움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게 하소서.
우리 구세주시여,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당신 육신 생명의 끝이었사오니
우리들도 영신적으로 우리 마음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도와 주소서.
예수여, 당신의 부활이 그 위대함으로 우리 영신을 채워,
당신의 성사들이 우리에게 그 부활을 반영해 주고 알게 해주는 거울이 되게 하소서.


우리 구세주시여, 당신이 지니신 계획은 영적 세계의 모형이오니
우리가 영적인 사람으로 그 계획 안에서 걸어가게 하소서.
주여, 우리 마음에서 당신의 영신적 현존을 앗아가지 마시고,
우리 감각에서 당신 현존이 주는 따스함과 부드러움을 거두지 마소서.
우리 육신 안에 숨겨 있는 사멸성은 우리 안에 부패를 생기게 하는 근원이오니,
당신의 영적 사랑을 부어 주시고 그 사멸성의 효력을 우리 마음에서 지워 주소서.
주여, 우리 본향에 속히 다다르게 해주시고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모세처럼
계시를 통하여 그 본향을 소유하게 해주소서.
(가톨릭굿뉴스홈에서)






메소포타미아의 니시비스(Nisibis) 태생인 성 에프라임(또는 에프렘)은 어느 이방인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양친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됨에 따라 18세 때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니시비스의 성 야고보(Jacobus, 7월 15일)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후일 이 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325년의 니케아(Nicaea) 공의회에 성 야고보를 수행하여 참석하였다.


시리아의 문헌에 의하면 350년의 페르시아 침입 때 그의 기도 덕분으로 니시비스가 해방되는데 큰 공로를 세웠으나, 363년에 요비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니시비스가 재차 페르시아의 수중에 들어가자, 그는 로마 땅인 에데사 근교의 동굴에 거처를 정하고는 신자들에게 설교하곤 하였다. 그리고 그는 부제였다고 한다. 그는 또한 이곳에서 그의 저서 대부분을 저술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370년에 카이사레아(Caesarea)로 가서 성 바실리우스(Basilius)를 찾았으며, 돌아오는 길에 372년과 373년 겨울의 냉혹한 기근을 덜어주는데 헌신적으로 일하였다고 한다. 그는 에데사에서 운명하였다.


성 에프라임은 성서적 근원을 밝히는 비중 큰 저서를 비롯하여 성서 주석, 교의 및 수덕 생활에 관한 수많은 글을 시리아어로 남겼다. 또한 그는 이단을 반박하는, 특히 아리우스(Arius) 이단과 영지주의를 공격하는 중요한 논리를 서술하였고,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이외에도 그는 복되신 동정녀에 대하여도 신심이 깊었는데, 그가 마리아의 원죄 없음을 단언하였기 때문에 흔히 ‘원죄 없으신 잉태’의 증인으로도 불린다. 또한 그는 공식 예절에 찬미가를 도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 교육에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전례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그의 업적은 일찍이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그리고 라틴어로 번역되어 자주 사용되었는데, 그의 니시비아어 찬미가와 절기에 따른 찬가는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업적으로 인하여 그는 ‘성령의 하프’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1920년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하여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교황이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한 것은 시리아 교회 출신으로 서방 교회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친 그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이었다.
 

참고자료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에프렘 부제 학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165-167쪽.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 '에프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2년, 6043-6045쪽.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시리아의 성에프렘 부제 학자', 서울(성바오로), 2002년, 138-139쪽. 
(가톨릭홈에서)





시리아는 예부터 가톨릭이 번성한 지방으로서 성인 성녀도 다수 세상에 내보내고 있으나, 6세기에는 그리스도 일성론(一性論)의 이단이 발생하게 되어 백성의 신앙이 크게 동요되었다. 이런 위기를 당하여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희생적으로 노력함으로써 대부분의 사람들을 오류에서 건지고 그리스도교의 피해를 최소한도로 막아낸 이가 성 에프렘이었다. 그러므로 그를 교회의 기둥이라 부르게 된 것도 당연하리라.


그의 생년월일은 명백하지 않으나 4세기초로 생각되며, 출생지는 시리아 동부에 있는 니시비스 시였다. 그의 참회록을 보면,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훌륭한 그리스도교적인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간한 장난꾸러기였던 모양이다. 가난한 백성의 소중한 소를 몽둥이로 때려 산중으로 쫓아버린 후 맹수에게 잡혀 먹었는지 소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얼마 뒤에 그는 여행을 떠나 어느 죄인과 함께 체포되어 죄도 없으면서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고 고문을 받기도 하는 등 갖은 환난을 당했다. 이에는 아무리 거칠었던 그도 대단히 공포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가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이 환난은 전에 지은 악행에 대한 보속이다. 그러나 곧 무죄로 석방되리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 그는 다음날의 재판에서 같이 체포된 다른 남자가 제 자신의 범죄를 자백해 에프렘은 사건과 하등 관계없음을 증명했으므로 그는 즉시 석방되었다. 이제까지 하느님의 섭리에 여러 가지 의심을 품었던 에프렘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깊이 느껴지는 바가 있어 세속을 떠나 광야로 가서 은수 생활을 시작하고 기도와 성서 연구 등에 몰두하며 세월을 보냈다.


이것은 마침 소아시아의 니케아에서 그리스도교의 제1차 공의회가 소집되었을 때의 일이다. 경건한 에프렘은 니시비스의 주교 성 야고보의 눈에 띄어 회의에 동행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 신앙의 대가라고 할 만한 세계 각지의 주교들의 풍채를 접하고 얻은 점이 적지 않았다. 그 뒤 그는 또한 니시비스도 돌아와서 야고보 주교로부터 그곳 교회의 보속된 어느 학교의 교직을 받게 되었는데, 곧 페르시아 왕 사볼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그 마을을 점령했으므로 그도 에데싸라는 곳으로 피난했다.


당시 에데싸에는 이단편과 가톨릭편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었는데, 에프렘은 이단편에서 아주 쉬운 노래를 작성해 이를 사람들에게 부르게 함으로써 이단의 확장에 노력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시재(詩才)를 발휘해 이에 대항하고자 구세주에 대한, 성모께 대한, 또한 축일에 대한 아름다운 시를 지어서 소녀 성가합창단에게 성전이나 다른 곳에서도 이를 노래 부르게 하여 호교를 위해 공헌했다. 이 일은 삽시간에 부근에 소문이 나서 길을 걸으면서도 그 노래를 부를 정도였으니 얼마나 진리의 보습에 공헌했는지 가히 알 것이다. 또한 그는 언변도 좋아서 그의 강론 시에는 많은 청중이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으므로 종종 강론을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된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입으로 선을 권해도 행동이 이에 따르지 않으면 도저히 남을 교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에프렘은 결코 자선 행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특히 373년 에데까 시내에 무서운 페스트가 발생해 맹위를 떨쳤는데, 이에 설상가상으로 흉년까지 들어 백성들은 병으로 신음하고 혹은 허기로 우는 자가 사방에 꽉 차 있었으므로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를 간호하고, 수치를 참아가며 부호의 가정을 방문하여 난민구제를 위해 힘썻던 것이다. 그리고 전염병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는 부근의 산속에 들어가 성서를 주해, 기록하며 경건히 그 날 그 날을 보내며 고요히 선종 준비를 했다.


그의 선종의 해는 출생한 연월일과 마찬가지로 확실치 않다. 다만 모든 점에서 추측컨대 379년이었으리아 생각되며, 다만 그의 선종일은 6월 9일이라 명백히 알려져 있다.
그의 장례식에는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도 추도의 강론을 행하고 고인의 유덕을 칭찬해 “그는 성인과 같았다”고 말하며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그의 전구를 구했다.


교회는 그에게 교부(敎父)라는 존칭으로 부르도록 했다.
또한 그가 남긴 수많은 시가(詩歌)는 지금도 사제의 성무 일도서에 포함되어
가톨릭 전례의 일부로 사용되며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신심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음악이 없는 전례란 상상하기 어렵다.

음악은 웅장한 대성당의 성탄 전야 미사에서 소성당의 조촐한 새벽 미사에 이르기까지

장소에 관계없이 전례를 풍요롭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또한 아름다운 성가는 우리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고 영혼을 정화시킨다.

 

4세기경 시리아에서 살았던 성 에프렘은 당시 이단자들이 수금에 맞춰 부르던 노래 가사를

가톨릭 교리에 맞게 고쳤으며 공식적인 전례에 사용할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성령의 하프’라고 불렀다.

여러 세기 동안 많은 음악들이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작곡되었다.

성가는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하고 기도 생활을 향상시킨다.

만약 당신이 헨델의 메시아나 모차르트의 레퀴엠처럼

종교적인 바탕 위에서 작곡된 곡들을 좋아한다면 그 곡들로 영혼의 빈 부분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가 말한 것처럼 “천국은 음악이다.”

 

어떤 종류의 음악을 즐겨 듣는가?

통속적인 음악보다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음악을 자주 듣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