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거룩한 진리의 징검다리, 유스티노와 이승훈

수성구 2022. 6. 1. 05:50

거룩한 진리의 징검다리, 유스티노와 이승훈

사도 20,28-38; 요한 17,11-19 /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2022.6.1.

 

  사도 시대가 끝나고 교부 시대로 접어들던 2세기 무렵에 활약한 유스티노는 본시  팔레스티나의 그리스계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자라면서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피타고라스 철학, 플라톤 철학 등에 연이어 몰두하였지만 만족하지 못하다가, 카이사리아의 바닷가를 산책하던 중에 신자 노인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유스티노는 그 친절한 노인의 권유로 성경을 부지런히 검토하였으며, 철학자들보다 더 진리를 확신했던 예언자들이 기록해 놓은 성경 말씀의 진리성에 매료되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로 하였습니다. 

 

  입교하여 신자가 된 후 그는 자신이 정통해 있던 그리스식 사고방식을 그리스도 신앙의 빛으로 비추어 사유함으로써, 그리스 문화권에서 살고 있던 평범한 사람들이 그리스도 신앙으로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 징검다리를 놓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로마인들에 맞서 논박하다가 로마황제를 신으로 숭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신론자로 단죄받아서 165년에 처형당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이 히브리 문화권에서 그리스 문화권으로 옮아가던 시대에 로마제국 통치 하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에 담긴 히브리적 사유에 그리스적 사유의 옷을 입혔던 신학자로서,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믿는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고 싸우다가 희생된 진리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에서도 진리를 위하여 살다가 희생된 순교자들이 많았는데, 신앙 진리를 히브리 문화권에서 그리스 문화권으로 건네준 유스티노와 함께 기억해야 할 인물이 중국에까지 온 서양 선교사들에게서 세례를 받고 나서 조선 백성들에게 세례를 전달해 준 이승훈 베드로입니다. 첫째, 그는 유학자로서 조정의 벼슬까지 하다가 이벽을 만나서 그리스도 신앙을 알고 나서, 그의 권유로 북경 남당에서 1784년에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벽과 그 동료들에게 세례를 전해줌으로써 한국교회를 창립한 주역이었습니다. 둘째, 그는 을사추조적발사건 이후 문중박해로 이벽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뒤를 이어 세례 받은 강학회 선비 아홉과 함께 열 명의 조직을 꾸려 이벽이 하던 교리 교육과 세례 성사 거행을 지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셋째, 1801년 신유박해 때에 천주교를 들여온 지도자라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이 명백한 역사적 행적이요 사실(史實)입니다. 

 

  이 과정에서 이벽과 마찬가지로 천주교를 두려워한 문중의 박해가 들이닥쳤고, 교리 교육과 세례 성사 거행을 하고자 꾸렸던 조직이 ‘가성직자단’을 결성한 ‘독성죄’라는 단죄를 받았으며, 조상제사도 금지한다는 칙령까지 받아서 이승훈은 심한 내적 갈등과 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천주교를 그만 두라는 부친의 뜻을 거역하기 힘들었던 효의 윤리와 자신이 진리라고 확신했던 천주교 신앙이 충돌했고, 교황청에서는 조상제사가 우상숭배라고 판단하여 금지했다지만 유학자로서 조상공경에 대해 지닌 신념에 따라 교황청의 판단이 옳은지에 대한 의구심과 충돌했던 터에 천주교를 싫어했던 동료 유학자들과 정적이었던 노론 유학자들의 공격과 음해, 중상모략 등이 겹쳤기 때문입니다. 이벽과 더불어 한국교회의 공동 창립 주역인 이승훈이 과연 진리의 순교자였는지, 아니면 배교자였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세 가지 기본적인 역사적 행적과 함께 위와 같은 세 가지 역사적 정황을 충분히 참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조차도 초대교회에서 배교자로 단죄받지 않았습니다. 또한 첫 부제 스테파노가 신앙 때문에 최고의회로부터 돌에 맞아 죽은 박해를 받을 때에도 나서서 감싸거나 반대하거나 하는 그 어떠한 태도 표명도 하지 않고 교회 지도자로서 우유부단한 처신을 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큰 그릇으로 쓰심으로써 용서하셨습니다. 거룩함과 진리를 판단하는 잣대는 역사적으로 동일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베드로가 배교행위에도 불구하고 순교하여 성인으로 인정받았다면 한국교회의 이승훈 베드로도 같은 잣대로 판단받아야 마땅합니다. 

 

  이승훈 베드로와 그의 강학회 선비 동료들은 천주학을 받아들이면서 수신치기(修身治己)와 극기복례(克己復禮) 등 인격 도야의 차원에서 진지하게 탐구함으로써 천주교를 받아들인 구도자들이었습니다. 그는 위에 언급한 세 가지 정황 탓으로 마음이 흔들리기는 했으나, 가혹한 고문과 함께 문초를 받는 과정에서 한 번도 동료 신자들이나 주문모 신부의 거취 등에 대해 발설한 적이 없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형장에서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유언은, “월락재천 수상지진”(月落在天 水上池盡)이었는데, 풀이하면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아도 못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 유언을 전해 받은 문중에서는 그의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모두 4대에 걸쳐 신앙을 지켜 순교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승훈을 고문하던 박해자들이 온갖 배교 소문에도 불구하고 그를 “조선에 천주교를 들여온 수괴(首魁)”로 단정짓고서 취조 직후 참수형을 집행한 것만 보아도 그는 신앙 진리를 부인한 배교자(背敎者)나 신앙 진리를 버린 기교자(棄敎者)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초석을 마련하여 우리 후손들이 진리를 위하여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순교자입니다. 신앙 진리를 이 땅에 들여온 주역인 이승훈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고 명예를 회복시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