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사도 12,24)

수성구 2022. 5. 11. 06:14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사도 12,24)

 

사도 12,24-13,5; 요한 12,44-50 / 2022.5.11.;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이기우 신부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45).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들은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신 이유는, 그분이 유다인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한 12,37). 이 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해 계셨는데, 그 바로 직전에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베타니아에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기적까지 베푸셨던 터였습니다. 그런데도 유다인들은 혁명당원들처럼 그분을 내세워 민중 봉기를 일으킬 음모를 꾸미거나, 사두가이들처럼 그렇게 위험한 그분을 죽여 없앨 음모를 꾸미는 등, 도무지 당신이 일으킨 기적들에서 하느님의 표징을 읽거나 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소생시키신 기적 이전에도 여섯 가지나 되는 기적을 일으키셨고, 이 기적들은 모두 당신 뒤에 계신 하느님을 보게 하기 위한 표징이었습니다. 특히 라자로 소생 기적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하느님의 권능을 보여주심으로써, 부활 신앙을 선포하기 위한 특별한 뜻으로 죽을 각오까지 하셔야 했던 위험한 상황에서도 감행하신 마지막 표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까지 유다인 군중에게 하신 후에는 더 이상 그 군중에게 나타나지 않으시고 오직 열두 제자들하고만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이 때 하신 가르침이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까지 매우 긴 분량으로 증언되고 있습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하시며 상호 섬김이야말로 비록 십자가 희생이지만 사실은 서로 사랑하는 부활의 행동이며, 이로써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그 뒤에 계신 하느님을 드러내는 일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이 상호 섬김의 삶으로 당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이들이 서로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이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22).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부활 신앙과 아울러 이를 드러내는 방식이 서로 섬김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임을 일깨워주셨고, 이 두 가지가 하느님께서 새롭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섭리라고 일러주셨습니다. 

 

  과연 초대교회 신자들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말씀의 실체란 영적으로는 부활 신앙이요 사회적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생하게 체험한 이들이 서로를 섬기면서 가진 것을 나누는 공동생활을 이룩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신자들은 부활 신앙과 공동생활을 증언하던 스테파노를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에서 죽인 터에(사도 7,54-60), 헤로데 영주가 야고보 사도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는(사도 12,1-5) 등 박해가 심해지자, 이스라엘을 떠나 더 넓은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선교사로 파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전개된 선교 활동을 통해 바오로는 소아시아와 그리스 등 로마제국 영토에서 유다인은 물론 이방인들에게 부활 신앙과 공동생활의 복음을 전하여 많은 공동체를 세웠고, 이 공동체들은 로마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널리 퍼져나갔고, 끝내 로마제국으로부터 공인을 받고(313년) 국교로까지(380년) 인정받았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를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기원이 될 정도로 중요한 메시아 강생이 초래한 역사적 위력이여, 이를 증거한 초대교회의 빛나는 역사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빛이심을 드러내셨고, 그분의 하느님께서는 영광스럽게 서양의 역사에 드러나시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뜻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우리 현실에서는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 머물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불가지론자들과 무신론자들입니다. 또한 신앙인들 가운데에서도,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이 생생하게 증언했던 부활 신앙을 관념으로만 간직한 이들도 많고, 그들이 부활 신앙의 표징으로써 목숨바쳐 이룩했던 공동생활을 막연한 이상으로만 바라보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생생하지 못하고 자라나지 못하며 널리 퍼져나가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라자로 소생 기적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깨우쳐 주시려던 뜻은, 부활 신앙은 죽은 다음 내세에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으로서 신앙인들을 삼기 위해서는 신앙인들의 부활 신앙이 생생해야 하고, 또 세상을 구원하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시 위해서는 부활 신앙에 입각한 공동생활 양식이 더욱 자라고 널리 퍼져야 합니다. 

 

  부활 신앙이 생생하게 살아 있으면 세례 때에 우리가 받은 영적 탄생의 은총을 실감하게 되고 과연 우리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남을 깨닫게 될 것이며, 공동생활 양식이 뿌리내리고 퍼져나가게 되면 과연 이 세상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으로 새로이 창조되어 나감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 이것이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