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수성구 2022. 5. 9. 04:26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사도 11,1-18; 요한 10,1-10 / 2022.5.9.;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제자들과 아나빔들이 그 복음을 알아듣는 매카니즘, 즉 메시지의 선포와 수용의 이 관계를 목자와 양 떼에 비유하셨습니다. 양들은 목자가 자신들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때 의미로가 아니라 음색으로 알아듣기 때문에, 낯선 음색으로 자신들을 부르는 거짓 목자의 목소리에는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이를 피해 달아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예수님의 이 비유를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알아듣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역사적 시행착오를 들려주었습니다. 예수님도 혈통상으로 유다인이셨고 제자들도 유다인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유다인 출신 초대교회 신자들도 할례 받고 율법 준수를 서약한 유다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생각만 했지,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목자로서 부르시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두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 세 번째에 가서 드디어 베드로가 목자의 음색을 알아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즉 다시 말하면 유다인이건 이방인이건 성속의 구별은 의미가 없으며,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 희생으로 모든 사람들을 인종에 상관없이 깨끗하게 성화시키셨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동안 이방인보다 깨끗하다고 자부했던 유다인들이 앞장서서 구세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터에 유다인들만을 선교의 대상으로 국한하는 선교노선은 이미 사실상 의미를 상실한 터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너무도 자명한 이치를 깨닫는 데에 초대교회 신자들은 본성적인 한계와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벽을 넘어서는 도전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250여 년 간에 걸쳐서 황제를 신으로 경배하라는 우상숭배를 강요당하면서 굶주린 맹수의 먹잇감으로 던져져서 죽어가야 했던 박해를 이겨내고 마침내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게 만드는 ‘신앙의 승리’를 맛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리고 나서는 이교적 풍습 일색이었던 로마제국의 관습과 제도와 권력까지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어처구니 없는 로마화, 서구화의 늪에 빠져들었습니다. 박해자였던 로마제국이 국교로 받아들이자, 순식간에 서구화된 로마식 가톨릭교회는 자신들보다 더 오랜 종교와 더 합리적인 문화를 지닌 동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면서도 서구식 신앙 형식과 교회 모델을 강요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불교와 유교의 문화를 우상숭배 풍조로 단죄하며 아시아 선교를 감행했으니, 그 결과는 대규모로 장기간 진행된 저항과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 그리고 그로 말미암안 선교 실패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은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가 아니라 낯선 목소리를 따라간 결과였던 것이고, 이는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로 복음의 시선을 향하기를 주저하던 베드로 당시 초대교회 유다인들의 관성적 선교 태도를 답습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본래 말씀은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초대교회 역시 아시아 서쪽 끝 이스라엘에서 탄생했었습니다. 동방으로 향한 복음화의 물결을 끔찍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이들은 조선의 선비들과 민중들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초석을 다진 선각자 선비들과 박해시대의 교우촌 신자들은 보편교회 초대교회의 신자들처럼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던 양 떼였습니다. 

 

  지금은 아시아인들을 제국주의적 침략 노선으로 위협하던 서구 열강 국가들을 경제적으로나 군사력으로 따라잡고 문화력으로도 앞선 우리 대한민국이 이제 새롭게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할 때입니다. 아시아는 물론 가톨릭의 보편교회까지도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응답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의 섭리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서구 교회의 선교사들이 목숨을 걸고 한국교회에 전해준 정통 신앙을 귀중한 자산으로 삼되, 서양 옷 대신에 우리 옷을 입었으면 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신앙을 전해줄 때에 이미 우리 선조들이 전해준 하느님 신앙이 저변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웃 중국과 일본에서 박해에 눌려 거의 죽어버린 신앙이 유독 이 땅에서만은 백 년을 버티었고, 그예 되살아나서 아시아의 독보적인 가톨릭 세력으로 우뚝 섰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는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신앙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까지! 이 점에서 사도 바오로의 발자취가 우리의 참고가 됩니다. 바리사이즘이 전부인 줄 알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과 민족의 정체성을 찾은 후에 이를 유다인들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알리려 했던 그가 우리의 모범입니다, 예수님 다음가는! 

 

  교우 여러분!

메시지 선포와 수용의 매카니즘에 있어서 한류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자의 음색을 알아듣고 제대로 그분의 부르심을 따라가야 합니다. 제대로 된 양 떼라면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가는 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5천 년 전부터 당신 목소리로 희미하게 우리를 부르시다가 2백 4십여 년 전에 제대로 불러주셨습니다.